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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용신부169

영혼의 현주소 영혼의 현주소 초행길에 찾아가야 할 곳을 어떻게 가야하는지를 전화로 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방에서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고 되묻습니다. 그런데 설명하기가 난감합니다. 큰 건물이 있거나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무슨 특징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정말 어렵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설명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쉽지는 않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갈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현주소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데 첫걸음은 영혼의 현주소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만 있다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의 현주소는 어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혼자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혼자만의 상상으로는.. 2014. 7. 22.
무거운 짐 줄이기 무거운 짐 줄이기 이솝 우화에 꾀 많은 당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소금 짐을 실었습니다. 당나귀는 소금 짐을 무겁게 지고 길을 가다가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당나귀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개울에 넘어졌습니다. 일어나서 다시 길을 가는데 소금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아하, 이거 잘 됐다!’ 생각하고 그때부터 개울만 만나면 쓰러져서 소금 무게를 줄였습니다. 나중에는 등에 빈 자루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당나귀가 꾀를 쓴 것을 알고는 혼을 내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음 날 주인은 당나귀 등에 솜뭉치를 실었습니다. 당나귀는 짐이 가벼웠으나 그 짐도 꾀를 써서 좀 가볍게 하고 싶었습니다. ‘오냐! 개울만 나와라. 또 넘어져서.. 2014. 7. 12.
베드로와 바울로 베드로와 바울로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은 ‘내가 나 답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문제일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표의 문제이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응답을 기다립니다. 인간의 가장 큰 에너지는 바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자각함으로서 생성되는 소명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지옥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자각한 사람이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한계를 뛰어넘어서 고귀한 가치와 사랑을 실천합니다. 역사는 바로 이 불타는 소명의식을 지닌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면서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은 .. 2014. 7. 12.
복음화의 사명 복음화의 사명 한 사람의 유언은 그 사람의 일생을 대변합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한 마디를 하는 것이 유언이니까요. 그래서 유언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또 어떤 가치관과 소망을 안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재산과 권력을 승계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유언의 가치를 오로지 법적인 기준으로만 볼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과 제자 사이의 유언이라면 반드시 이생을 바쳐서 이루어야 할 가치와 소망을 담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부모가 자녀들에게 남기는 유언도 스승의 유언처럼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언을 두 번 하신 분입니다. 첫 번째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베풀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면서 ‘기억하라!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 2014. 6. 20.
오소서,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신앙에서 가장 신비롭고 달콤한 것은 성령의 강림과 인도하심입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에게 임하시어 세속에서 얻을 수 없는 가장 기쁘고 평화로운 상태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이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라고 했습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어도 이런 것들을 교육과 수련으로서 인격적으로 갖출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덕목들을 자랑하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이루어주시는 열매로서의 이런 덕목들은 자신 안에 담겨있는 영원한 신성의 깨어남으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입니다.. 2014. 6. 14.
하늘과 땅의 소통 하늘과 땅의 소통 예수께서 탄생하신 성탄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높고 거룩한 보좌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감시하고 조종하시지 아니하고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버림받은 병자, 세리, 창녀, 어부 등과 같은 낮은 사람들, 작은 사람들을 섬기고 존중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정도가 아니라 하늘이 땅을 섬기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 승천하신 것은 땅이 하늘로 올라간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이 죽음과 죄에 사로잡힌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직접 하늘 문을 열고 승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동양의 고전인 주역은 우주의 운.. 2014. 6. 6.
희생자들이여, 역사에서 부활하라! 희생자들이여, 역사에서 부활하라! ‘망각은 노예의 길이요, 기억은 구원의 신비이다!’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새겨진 경구라고 합니다. 유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 나치스에게 학살당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을 구원과 연관시켜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단 히틀러에게 당한 학살뿐만 아니라 유태인들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배척과 소외 그리고 학살을 당해 왔습니다. 그들이 그런 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은 절대적인 국민적 사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모진 고초를 당하셨던 할머니들을 뵈면 두 가지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반성’입니다. 다들 연세가 높으셔서 사실 날이 얼마.. 2014. 5. 30.
길과 진리와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복’이라는 양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어가지만 앞에 가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어서 먹을 풀이 점점 없어지자 뒤따르는 양들이 서로 앞서겠다고 다툼을 벌이게 됩니다. 그래서 양들의 대열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뒤쪽의 양들이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기 때문에 앞쪽은 선두를 지키기 위해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든 양떼가 전속력으로 앞으로 내달리다가 달려가는 힘에 의해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버린답니다. 미련한 짐승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겠지만 돌이켜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너도 나도 빨리 달리기는 하는데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흔히 비유하기.. 2014. 5. 19.
착한 목자 착한 목자 현대사회에서 인간관계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은 사람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입니다. 상품을 파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소비대상’으로 보고, 교육자들은 학생들을 ‘교육대상’으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을 무슨 무슨 대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제일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선거철마다 ‘공략대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연령별, 지역별, 계층별로 표심을 얻기 위한 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느새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수없이 대상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대상화’의 문제점은 무슨 대상으로서의 목적이 사라지면 아무런 관계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 아니라 이해관계로만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을 그 자체의 존엄성과 가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2014. 5. 13.
나그네의 희망 나그네의 희망 “밀가루를 싣고 빵 공장에 가는 트럭과 시멘트를 싣고 벽돌 공장에 가는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서 멈췄습니다. 트럭 운전수들은 화장실에 갔다 와서 트럭을 탔는데 그만 서로 바꿔 타고 말았습니다. 두 운전수는 똑 같이 ‘알게 뭐야’라고 생각하며 차를 몰아 목적지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시멘트를 실은 트럭은 빵 공장으로, 밀가루를 실은 트럭은 벽돌 공장으로 간 것이지요. 공장 기술자도 ‘알게 뭐야’를 외치며 빵 반죽에다 시멘트를 쏟아 붓고, 벽돌 반죽에다 밀가루를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빵이 가정에 배달되고 벽돌은 집 짓는 곳에 옮겨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이빨이 다친 채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이현주 목사의 동화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 2014. 5. 10.
주님의 평화 주님의 평화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27일 부활 2주일 설교 말씀) 예수님 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듯이 자신들도 그렇게 죽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에 가득 찬 유다인들은 훗날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고, 헤로데 왕이 야고보를 참수하자 환호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제자들이 겁을 먹을 만도 합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무지에서 온다고들 합니다. 예를 들면 암 진단, 채무 독촉, 법원의 출두 명령서 등을 받아놓고는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를 잘 알면 두려움은.. 2014. 4. 29.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20일 부활주일 설교 말씀) 25년 전, 아카시아 향내가 산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오월에 강화도 농촌 마을에 당도했습니다. 처음 목회지에 도착한 마음은 참으로 낭만적이었습니다. 이 평화로운 농촌에서 그래도 신앙적 계몽자로서,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마을을 변화시키고 나아가 농촌 사회에 희망을 주리라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어리석으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교만한 우월주의의 환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대한’ 목표는 한 사건에 의해서 여지없이 그 허망한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놀이가 상대적으로 단순한 시골에서 여름방학.. 2014.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