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짐 줄이기
이솝 우화에 꾀 많은 당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나귀 등에 소금 짐을 실었습니다. 당나귀는 소금 짐을 무겁게 지고 길을 가다가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당나귀가 그만 발을 헛디뎌 개울에 넘어졌습니다. 일어나서 다시 길을 가는데 소금 짐이 훨씬 가벼워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아하, 이거 잘 됐다!’ 생각하고 그때부터 개울만 만나면 쓰러져서 소금 무게를 줄였습니다. 나중에는 등에 빈 자루만 남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당나귀가 꾀를 쓴 것을 알고는 혼을 내어주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음 날 주인은 당나귀 등에 솜뭉치를 실었습니다. 당나귀는 짐이 가벼웠으나 그 짐도 꾀를 써서 좀 가볍게 하고 싶었습니다. ‘오냐! 개울만 나와라. 또 넘어져서 이 짐을 가볍게 하리라!’ 이렇게 마음을 먹은 당나귀는 개울이 나오자 쓰러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짐이 오히려 무거워졌습니다. ‘왜 이러지?’ 그래서 다음번에는 더 많이 자빠져서 짐이 푹 잠기게 했습니다. 등 짐은 오히려 훨씬 더 무거워졌습니다. 솜에 물이 흠뻑 젖어서 당나귀는 다리를 휘청거리며 길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라고 하신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 자신의 고생스러운 인생의 짐을 내려놓고 평화를 얻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들, 또 해봤자 별반 도움도 되지 않고 구약 성서에서 욥의 친구들이 귀찮게 하듯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더 무겁게 만들기도 하는 경우도 많기에 우리는 결국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면 사업도 잘 되고, 건강도 좋아지고, 자녀들 입시도 잘 풀린다는 생각에 교회에 나왔다가 오히려 원치 않는 짐을 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입니다. 매 주일 꼬박꼬박 참석하라고 하지를 않나, 헌금도 내야하고, 봉사도 해야 하고, 미운 사람을 용서 하라고 하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라고 하니 엄청난 짐이 아닐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마치 꾀 많은 당나귀와 다를 바가 없는 어리석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계명을 ‘멍에’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계명이라는 것에 매몰되어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 비난하며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관 주인인 프로크루스테스는 행인들을 침대에 눕혀 키가 침대보다 크면 자르고,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서 죽이는 악한이었습니다. 자기 기준에 의해서 남을 평가한다는 것이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신화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준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더 큰 명에를 짊어지게 하는 아집과 편견의 잣대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두 다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온유와 겸손의 새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영혼의 안식을 얻으리라...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했습니다.
그 짐이란 바로 사랑의 짐입니다. 사랑할 때 따르는 약속과 책임의 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없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기쁜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는 무거운 짐은 오히려 기쁨의 원천입니다.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귀중한 소명입니다. 사랑을 위해서 지출하는 비용은 손실이 아닙니다. 기쁨의 선물입니다.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참아주고 용납해주는 사람 아닐까요? 그래서 부끄러운 흉이나 허물도 안심하고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예수께서는 바로 그런 벗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무거운 짐을 다 이해하시고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예수 안에서 영혼의 안식을 얻읍시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7월 6일 연중 1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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