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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종교가 사악해 질 때

by 분당교회 2014. 7. 26.

종교가 사악해 질 때

최근 인도의 불교 성지에서 한국에서 온 개신교 신자들이 기타를 치며 찬송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는 영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곳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불교 최고의 성지인 사원이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찬송가와 통성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마침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묵언수행 중이던 한국인 스님이 할 수 없이 수행을 중단하고 제지에 나섰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느님만이 오직 구원’이라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스님이 한국에 알리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사원을 나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개신교인들의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와 전도활동 사례는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부산지역에서 수 천 명이 모인 강당에서 선교대회를 하는 중에 ‘사찰아 무너져라!’하면서 열광적인 기도를 하는 장면, 강남의 봉은사에서 ‘하느님의 땅’에 ‘우상 숭배’가 서 있는 것을 개탄하며 하느님 땅의 회복을 기도하는 장면, 미얀마 사원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승려와 어린이들을 데리고 손잡고 기도하는 장면.... 무수히 많습니다.

인도 불교 성지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 유산인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법당 입구에서 3명의 한국 기독교인이 찬송을 부르고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선교는 과감하고 열정적이며 헌신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 상으로 이들의 주장이 맞다고 교회에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상식과 예의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는 어떨까요? 교회 밖에서는 상식과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손가락질합니다. 만일 자기들의 성스러운 예배당 안에서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한다면... 그것도 교회가 멸망하기를 기원한다면... 가만히 있을 교인은 없을 것입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전 세계는 경악하면서 종교의 의미에 대해서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선포하고 신의 이름으로 파괴와 살인이 저질러진다면 죄의식도 없고 자신의 행동을 신앙적으로 정당화하게 됩니다. 종교가 범죄의 뿌리가 되고 이를 신의 이름으로 신성시하는 사악한 현상은 이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를 두고 종교 근본주의라고 하는데 이는 정치에 있어서 파시즘과 동일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단일한 세계관과 가치관만을 용인하며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은 죄악시하는 것입니다. 이를 철저히 교육시키기 위해서 교육과정과 기관을 통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코란을 문자적으로 암송시키고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하는 것과 히틀러가 모든 독일 국민들이 단일한 생각만을 갖도록 강요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소수자들에 대한 공격적인 억압을 통해 자신의 사상이 우월하다는 것과 순수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히틀러가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하는 것과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여성들을 학대하는 것을 보면 이 역시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의 파시즘이 근본주의이며, 정치의 근본주의가 파시즘이라고 말해지기도 합니다.

찰스 킴볼이라는 종교학자는 ‘종교가 사악해 질 때’라는 책에서 종교적 신앙이 가지고 있는 사악한 징조를 다섯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들만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믿을 때, 둘째는 ‘맹목적인 복종’, 셋째는 ‘이상적인 시대의 확립’이라는 왜곡된 메시아니즘, 넷째는 신성한 ‘목적은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자가당착’, 다섯째는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 안에 있으면서 종교를 사악하게 만들게 하는 근본 원인이 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는 소지가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녹은 쇠에서 나와 쇠를 갉아먹는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 선한 씨가 뿌려져서 알곡들이 자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라지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이를 가려내서 뽑아내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는다고 덤비다가 밀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가만 두어서 심판 때에 가려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교회 안에 있었던 잡음과 혼란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엄밀히 따지만 예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 공동체의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 밖의 반사회적 범죄에 대해서 이를 놔두라고 한다면 오히려 복음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라지는 어디 다른 곳에서 오지 않습니다. 안에서 나와서 은밀하게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복음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바라보고 있는가를 늘 되돌아봐야 합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7월 20 연중 16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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