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희망
“밀가루를 싣고 빵 공장에 가는 트럭과 시멘트를 싣고 벽돌 공장에 가는 트럭이 고속도로를 달리다 휴게소에서 멈췄습니다. 트럭 운전수들은 화장실에 갔다 와서 트럭을 탔는데 그만 서로 바꿔 타고 말았습니다. 두 운전수는 똑 같이 ‘알게 뭐야’라고 생각하며 차를 몰아 목적지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시멘트를 실은 트럭은 빵 공장으로, 밀가루를 실은 트럭은 벽돌 공장으로 간 것이지요. 공장 기술자도 ‘알게 뭐야’를 외치며 빵 반죽에다 시멘트를 쏟아 붓고, 벽돌 반죽에다 밀가루를 쏟아 부었습니다. 거기서 나온 빵이 가정에 배달되고 벽돌은 집 짓는 곳에 옮겨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집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이빨이 다친 채 배를 움켜쥐어야 했습니다.” (이현주 목사의 동화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과 슬픔은 바로 이런 ‘알게 뭐야’ 정신의 소산이 아닐까요? 세월호의 출항으로부터 침몰, 구조의 모든 과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무책임의 종합선물 세트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관련자들의 무책임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캐고 또 캐고 보면 ‘물신숭배’라고 하는 악령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수익을 얻고자 하는 경제논리로 고물 배를 수입해서, 선박을 개조하고, 임금 지출을 줄이느라 선장 이전에 인간적인 자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을 비정규직으로 선장과 선원으로 고용하고,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화물을 세 배 이상이나 과적을 해서 출항을 하는 과정은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그 과정에 관계 당국의 묵인과 승인이 반드시 있었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돈 버는 일이라면 악마와도 입맞춤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같습니다. 배가 침몰 해 가는데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예외 없이 무책임과 무능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또 여기서도 비용 지출을 둘러싼 책임 문제로 적극적이고 전폭적인 구조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할 때는 정말 이 사회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참함을 느끼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 - 브뤼겔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자 희망의 뿌리가 뽑힌 것처럼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달아났습니다. 예수께서는 외롭게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거절당한 예수님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침몰 된 배에서 어느 학생은 ‘구조 좀...’이라고 애타게 부모에게 절규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등지듯이 어른들은 구조를 애타게 호소하는 어린 학생들의 손길을 외면했습니다.
물신숭배는 사람들을 철저히 갈라놓습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각자 알아서 자기 살 길을 찾도록 강요합니다. 도덕이나 사랑은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하며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도덕이나 양심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시켜주는 것도 아니니 자연 냉정하고 살벌한 정글의 법칙에 몸과 영혼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절망적인 ‘침몰’은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희망의 뿌리가 뽑혀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어도 태양은 빛나는 법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초월적 능력’, 즉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희망의 뿌리가 뽑힌 것처럼 실의에 빠진 두 나그네한테 예수께서 다가왔습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 좌절한 두 사람은 예수께서 곁에 계시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눈이 가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도대체 믿을 수 없었던 두 사람에게는 희망의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리고 성찬으로 그 사람들의 마음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전과는 다른 확신을 갖게 했고,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녁이 지났지만 곧 그곳을 떠나 다시 예수를 죽인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절망으로 왔던 그 길을 희망으로 걷습니다. 그리고는 공동체에 회귀합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체험을 나눕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했습니다만, 우리는 모두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망의 길을, 또 어떤 사람은 희망의 길을 갑니다. 무엇에 희망을 걸어야 할까요? 우리를 수없이 좌절시키고 불행하게 하는 물신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 희망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대에 우리가 거듭나고자 한다면, 그래서 이 사건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역사로서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면 예수께서 주시는 희망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5월 4일 부활 3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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