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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436

선교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무엇인가 불타오른 것을 보면, 그것을 타오르게 하는 불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선교를 보고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에밀 부르너)교회의 존립 목적은 당연히 ‘선교’(mission)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뜻과 사랑을 ‘지금’, ‘이곳에서’ 성취하시려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그래서 하느님의 심부름꾼(agent)으로서 하느님의 사역을 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또한 그 일을 담당하게 하시려고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어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진리를 배우고 깨우치며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백성들의 삶의 구심점이며, 흔들리지 않는 진리.. 2015. 5. 1.
증인의 사명 증인의 사명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살아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이 아니라 뼈와 살이 있고 음식까지도 잡수시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부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분명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런 기적을 증언하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초능력의 소유자이심을 과시하면서 이를 선전하라는 당부가 아니라는 말씀도 아니고, 그러니 모두 나아와 엎드려 섬기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2015. 4. 27.
진실의 증언 진실의 증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첫 선물은 바로 평화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겁에 질려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겁을 내고 두려워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 치고 재판한 유다인들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들은 박해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그들 내면에 있는 불안과 죄책감이 아닐까 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그들의 양심을 .. 2015. 4. 18.
‘잔인한 달’과 부활 ‘잔인한 달’과 부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 (球根)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주었다.’ T.S. 엘리엇 에서 왜 4월은 잔인하다고 했을까요? 그것도 보통 잔인한 것이 아니라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달, 인생의 모든 날들이 잔인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시인 엘리엇의 눈에는 4월이 가장 잔인하게 보였습니다. 겨울엔 모든 것이 긴 잠에 빠져듭니다. 부끄럽고 추한 것들도 눈으로 감추어주고 잊게 해줍니다. 그런데 다시 봄이 오면, 잠에서 깰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길들여졌던 무기력과 나약함을 이겨내야 하는 일은 귀찮기도 하고.. 2015. 4. 6.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 시에서 발생한 대화재의 범인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지목하고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한테 물어 뜯겨 죽이고, 인간 횃불이라 하며 산채로 화형으로 죽이는 등 가혹한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이 때 신도들의 권유로 로마를 빠져 나가던 베드로는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동산에서 떠올랐을 때, 베드로는 태양의 황금빛 테두리가 땅을 향해 퍼져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찬란한 빛 앞에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손을 쳐들어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귀에는 ‘네가 나의 어린 양을 버리면 내가 로마에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발길을 다시 로마로 되돌렸습니다... 2015. 4. 3.
희생 없는 신앙? 희생 없는 신앙? 겨우내 얼었던 대지에 봄기운이 돌더니 새싹이 돋아나고 있습니다. 저 여린 새싹들이 이 봄날을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가을 가졌던 것을 모두 내어주고 얼어붙은 땅 속에서 기다리고 참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간이 가면 저절로 오는 봄날보다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며 준비해 온 사람들이 맞는 봄날이야말로 참다운 새날을 맞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새날을 꿈꾸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까요? 종교와 신앙은 한 편으로는 인생과 역사의 새날에 대한 희망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과 인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하셨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신앙인들은 늘 새 삶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며 변화.. 2015. 3. 27.
관심이 불러 온 변화 관심이 불러 온 변화 사람에게는 그리워하는 대상의 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누군가 돈을 그리워하면 그 사람에게서는 돈의 향기가 나겠지요. 또 누군가 권력을 그리워하면 역시 그에게서 권력의 냄새가 날 것입니다. 사랑을 그리워하면 사랑의 향기가, 꽃을 그리워하면 꽃향기가 날 것입니다. 오물이 썩는 곳에서 맡은 악취가 코끝에서 맴돌기도 하고 옷에 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냄새는 시간이 가고 목욕을 하고 빨래를 하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나는 인격의 냄새는 좀처럼 지워지지 않습니다. 한번 만나 본 사람에게서 지독한 인격의 냄새가 났다고 한다면 아마도 계속해서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무슨 향기가 날까요? 또 사람은 관심의 크기와 방향대로 살아가게 되어.. 2015. 3. 23.
성전의 도덕성 성전의 도덕성도덕적이지 않은 성전이 있을까요? 성전은 성전 자체로서 신성한 공간이기 때문에 도덕성을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전이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이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세상에서 부도덕한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신성한 성전에서 죄를 씻고 거듭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 성전이 부도덕하다면 인간의 죄는 어디서 씻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성전이 부도덕해지면 하느님 역시 부도덕한 존재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을까요?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의 상징을 성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는 성전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 2015. 3. 16.
자기 십자가 자기 십자가 십자가는 구원과 은총의 상징이지만 원래는 죄수들의 사형방법이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인들이나 노예들 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해서 가장 극악한 형벌로서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십자가형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통해 보듯이 나무 기둥에 죄수의 양팔목과 발목을 못으로 박아 고정합니다. 이때 무릎은 약간 구부려진 상태로 여유를 줍니다. 이것은 양팔로만 지탱되는 몸이 서서히 밑으로 쳐지면서 횡격막을 압박하여 숨을 쉴 수 없게 되면 다시 구부러진 다리를 펴서 올라가 호흡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 합니다. 얼핏 보면 목숨을 연장시켜주도록 하는 배려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더 서서히 고통을 받아 숨지게 하려는 잔인한 배려일 뿐입니다. 뜨거운 광야나 돌산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2015. 3. 7.
두 번의 유혹 성서에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결정짓는 ‘유혹’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하나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광야에서 수행하실 때 사탄에게 받은 유혹입니다. 구약에서 인류 생활의 첫 시작이 유혹에 빠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시작했다면, 신약에서 새사람이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 나라를 시작한 것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받은 유혹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뱀이 하와를 꼬일 때 절대로 죽지않는다고 하면서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뱀이 .. 2015. 2. 22.
나병환자의 애원 나병환자의 애원예수께서 길을 가시는데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나병은 피부가 썩는 병이라 예수님 시대에는 그것이 불치의 병이요 하늘이 내린 형벌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병환자는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 헤친 차림으로 마을 밖에서 살면서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누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들 곁에 갈 수도 없고, 오는 것마저 막아야 하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 속의 환자는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무릎 꿇고 애원을 합니다. 그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겪는 외로움과 고통을 한하운이라는 시인은 ‘소록도 가는 길’에서 말.. 2015. 2. 17.
사람을 찾는 예수님 사람을 찾는 예수님어리석은 질문이고 상상이겠지만, 예수님은 그 크신 권능과 자비로 모든 병자들의 병을 쉽게 그것도 한꺼번에 낫게 할 수 있을 터인데 전혀 그런 조짐조차도 볼 수가 없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서 모든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고통과 갈등을 없게 할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오히려 거절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사악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시어 세상에 평화를 이루시면 편리할 것을 굳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실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게도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병자들을 한꺼번에 치유하신 것도 아니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를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고 구원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2015.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