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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by 분당교회 2015. 4. 3.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로마 황제 네로는 로마 시에서 발생한 대화재의 범인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지목하고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한테 물어 뜯겨 죽이고, 인간 횃불이라 하며 산채로 화형으로 죽이는 등 가혹한 박해를 자행했습니다. 이 때 신도들의 권유로 로마를 빠져 나가던 베드로는 들판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침 해가 동산에서 떠올랐을 때, 베드로는 태양의 황금빛 테두리가 땅을 향해 퍼져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찬란한 빛 앞에 베드로는 무릎을 꿇고 손을 쳐들어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귀에는 ‘네가 나의 어린 양을 버리면 내가 로마에 가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리라!’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발길을 다시 로마로 되돌렸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주님과 똑같은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박힌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베드로의 순교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렇게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폴란드의 작가 셴키예비치가 감동적인 소설로 형상화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여러 차례 예수님의 뜻에 부딪혔습니다. 3년이나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베드로는 핀잔과 칭찬을 번갈아 가며 받았던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극구 만류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할 정도로 심한 질책을 했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인간의 일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산 위에 올라갈 때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를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께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다며 머물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을 때에 베드로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자신은 감옥도 좋고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던 그 순간 닭이 울었고, 예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똑바로 바라보셨습니다. 아마도 눈이 마주쳤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습니다. 서양의 명화 중에는 베드로가 슬피 우는 모습을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해지고 있는 그레코라는 사람이 그린 그림입니다. 여기서 표현되는 베드로는 비통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열쇠꾸러미를 차고 알 수 없는 허공을 우러러보며 울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승천하신 후 매일 새벽 첫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일어나 기도를 하고 몹시 울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항상 수건을 한 장을 가슴에 넣고 다니며 넘쳐흐르는 눈물을 닦았다는데, 너무 자주 울었으므로 베드로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서 항상 짓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군중들은 이스라엘의 왕이 오신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배반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던 그 순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다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역시 배반입니다. 같은 배반이라 하더라도 군중들의 배반보다도 제자들의 배반은 예수님을 더욱 괴롭혔을 것이라 보여 집니다.

Jan Baegert 작, 매질하고 가시관 씌우기 (Die Geißelung und die dornenkronung Christi)

그러나 오늘날 아무도 베드로를 배반자라고 해서 배척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배반한 경험이 있기에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사랑과 믿음이 불타올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눈물에 얽힌 이야기들과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아니 십자가 없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수난을 만류하고, 영광스럽게 변모한 예수님께 안주하기를 바랬던 마음은 십자가 없는 예수를 통한 성취를 목표로 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물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느님이 인간에게 처음 하신 질문입니다. 20세기 고난 받는 흑인들은 스스로 물었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다시 우리는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면 다시 예수께서는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도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십자가에 박히러 가리라!’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29일 고난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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