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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용신부169

이 어리석은 자야! 이 어리석은 자야!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행복 또는 영적인 삶을 유보하고 사는데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갓난 아이 때부터 경쟁력을 키울 목적으로 영어에 익숙해지려고 하고 보다 좋은 유치원을 찾습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천재성(?)에 감탄을 하면서 장차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꿈을 키워갑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선행 학습은 물론 필수입니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이 학원 저 학원을 옮겨 다니면서 일류 대학 진학 프로젝트를 구체화합니다. 방학도 목적이 있는 체험과 연수로 채워지기 쉽습니다. 가면 갈수록 심한 경쟁에서 싸워 이겨나가는 훈련은 필수입니다. 청소년기의 꿈과 행복은 철저히 유보되어 나중에 일류 대학에 진학한 후로 미루어져야 합니다. 청소년기에 영혼의 양식을 추구한다거나 우.. 2016. 7. 31.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루가 11:9-10) 기도에 대해서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기도는 적극적으로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데, 어떤 노력도 소망도 기원도 없이 구해지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한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구하는 것을 모두 얻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우선 병원이 문을 닫을 것입니다. 병든 사람들이 기도해서 몽땅 낫게 되면 병원이 필요가 없게 되겠지요. 의사도 간호사도 의료 산업 모두 폐업과 실직의 대열에 들어서야 할.. 2016. 7. 25.
필요한 것은 한 가지 필요한 것은 한 가지 예수께서 유난히 사랑하던 한 가정이 있습니다.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모습은 대조적입니다. 마르타는 매우 적극적이고 행동적입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찾아오실 때 마르타는 마중을 나가고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서야 집을 뛰쳐나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언니 마르타와는 달리 마리아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그 사건 후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라자로는 손님들 사이에 끼어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다닙니다. 그 때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을 닦아 드립니다.(요한 .. 2016. 7. 22.
누가 이웃인가? 누가 이웃인가? 저 맑은 하늘에 빛나는 태양은 사람을 골라서 햇빛을 내리지 않습니다. 또한 비가 내릴 때도 사람을 가르지 않습니다. 비와 햇빛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큰 사람, 작은 사람, 어디 출신 따질 것 없이 똑같이 내리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꽃이 향기를 뿜어 줄 때 젊은이와 어르신, 고상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남자와 여자, 짐승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랑이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지참금이나 혼수품을 뭘 들고 오는지에 관심을 쏟다보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고 물질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마음에 맞는 사람들 또는 익숙한 사람들만 사랑하고 낯선 사람들을 따돌린다면 보상을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2016. 7. 11.
망설이는 사람 망설이는 사람 ‘뒤 돌아 보지 마라!’는 말은 성서뿐만 아니라 신화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돔 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을 때,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가족을 살려주면서 “저 소알이라는 땅으로 도망가라. 그러나 가는 길에서 뒤는 돌아보지 말아라.”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무사히 탈출한 일행 중에 롯의 아내가 뒤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불타는 소돔 성과 함께 죽어가는 과거를 보다가 자신도 죽었습니다.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한국의 설화에 ‘장자 못 전설’(장자는 부자를 뜻하는 말)이 있는데 무려 100군데도 넘는 지역의 전설로 전해집니다. 옛날에 아주 인색하고 포악한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외양간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스님이 와서 시주를.. 2016. 6. 29.
악령의 호소 악령의 호소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 지방에 다다랐을 때 예수와 마주친 악령이 소리 질렀습니다.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존재, 그리고 예수의 권위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한 마디가 악령으로서는 괴롭고 참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악령은 스스로 독립해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항상 어떤 사람 속에, 급기야는 돼지 속에 들어가서 기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 악이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항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번식합니다. 그 수효가 엄청 많아서 ‘군대’라고 했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 2016. 6. 17.
참회의 축복 참회의 축복 진리를 탐구하고 깨닫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진실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진리라는 것도 진실함에 답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실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맑고 아름다운 하늘처럼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하느님 앞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를 훈련하고 하느님께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식사 중에 한 여인이 다가와 눈물로 발을 적십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고 나서 향유를 적십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면 발을 적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리기 위해 얼마나 깊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할까요? 악어의 눈물이라는 위선적인 눈물도 있지만 이 여인의 눈물은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눈물임.. 2016. 6. 13.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기적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거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일 때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거나 할 때 반드시 ‘측은한 마음’부터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감각한 마술사가 아니라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공감 없는 기적은 단지 신기한 현상일 뿐이겠지만 슬픔과 아픔을 나누는 가운데 이루어진 기적은 사랑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 데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 그리고 장례행렬의 만남은 마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행렬과 죽음과 절망의 행렬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만남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죽은 사람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2016. 6. 7.
믿음을 넘어서 깨달음으로 믿음을 넘어서 깨달음으로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합니다. 표층 종교에 머무는 신앙인은 교회나 절을 다니는 것, 헌금 바치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 등을 통해서 내가 복을 받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땅에서 병들지 않고 재산도 많이 형성해서 남보란 듯이 살고 또 죽어서도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심층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은 같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의 욕심을 줄여가고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공감하며 사랑을 베푸는 훈련에 관심이 있습니다. 종교 의례에 참석하면서도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또한 표층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은 초월적인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 2016. 5. 25.
성령을 담는 그룻 성령을 담는 그릇 겉으로 보기에는 늘 푸른 듯한 상록수도 때가 되면 잎갈이를 합니다. 사시사철 청정하게 보이는 대숲도 새 죽순이 올라올 무렵이면 겨울을 버티던 묵은 잎이 지고 그 자리에 새 잎이 돋아납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묵은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준엄한 법칙입니다. 묵은 잎이 떨어지고 새 잎이 돋아나는 변화가 없다면 늘 푸른 나무일 수가 없고, 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피어있는 것만이 꽃이 아니라 지는 것 또한 꽃입니다. 그래서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질 때도 고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위해서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삽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 생명에게 낡은 생명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봄철이 무르.. 2016. 5. 16.
‘없이 계시는’ 예수님 ‘없이 계시는’ 예수님 성탄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낮은 곳으로 오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부활 승천은 땅이 하늘로 올라간 ‘초월’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땅만 쳐다보고 있다면 초월자이고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는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우상을 찾는 것이고 영원하신 궁극적 실재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태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승천의 사건을 우리는 예수께서 우주 공간 어디로 날아가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주개발 시대를 살.. 2016. 5. 13.
낫기를 원하는가? 낫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지만 영적인 기쁨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행위만 남을 때,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앞 설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만과 짜증, 권태가 느껴질 때, 기도와 말씀을 통한 마음의 평화보다는 속된 쾌락이 우선될 때 우리는 영적인 침체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마비 또는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이 없다고 여겨지고 자신의 영적생활에 무관심해지고 더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거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몸도 교회에 있지만.. 2016.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