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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님의 측은지심

by 분당교회 2016. 6. 7.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기적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거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일 때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거나 할 때 반드시 ‘측은한 마음’부터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감각한 마술사가 아니라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공감 없는 기적은 단지 신기한 현상일 뿐이겠지만 슬픔과 아픔을 나누는 가운데 이루어진 기적은 사랑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 데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 그리고 장례행렬의 만남은 마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행렬과 죽음과 절망의 행렬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만남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죽은 사람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드라마에도 숱하게 등장하는 아주 특별한 인간관계로서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사랑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각별합니다. 특히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으니 그 슬픔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이 어렵겠습니다. 그 슬픔이 얼마나 크면 새끼 원숭이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토막 났다는 ‘단장’(斷腸)의 고사가 있겠습니까?


(James Tissot)


일부 사람들은 홀어머니의 삶의 이유가 되어있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장성해서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이 인생의 유전이라고 한다면 언제까지 아들을 어머니의 소유로 묶어둘 수는 없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어머니의 슬픔을 보고 장차 의지하고 살아야 할 아들을 잃어서 슬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노후생활을 위한 투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기에 홀어머니의 슬픔이란 아들이 불쌍해서, 인생의 꽃도 다 피어보지 못하고 죽게 놔둘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한계에 대한 미안함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차라리 아들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과 아들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다는 정황은 없습니다. 처음 본 사람입니다. 이름도 알지 못하고 또 묻지도 않습니다. 아들이 왜 죽었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사정을 분석해서 어떤 잘 잘못을 따진다거나 판명하지 않으십니다. 단장의 아픔으로 슬퍼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측은지심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상여를 막고 ‘젊은이여,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내가 살려냈으니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어떤 은혜와 보답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와 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고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이 극적이고 자비로운 사건 앞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때의 두려움은 맹수나 악인을 만났을 때 느끼는 ‘공포’가 아닙니다. 유한한 인간이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신적인 존재와 마주쳤을 때 느끼는 전율 같은 것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종교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체험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 할 줄 알고 또 그 자비를 확실히 믿습니다. 하느님을 공포와 징벌의 주관자가 아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분으로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관과 삶의 태도가 변화됩니다. 예수님의 기적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홀어머니와 아들이 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또 다시 한 젊은이의 죽음이 우리 사회를 충격과 슬픔에 몰아넣었습니다. 19세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가 지하철 안전문을 수리하는 도중에 달려오는 열차에 치어 비명횡사했습니다. 그의 가방에는 연장들과 컵라면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아내야 했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도 학교를 보낼 걸...’하며 흐느낍니다. 최저가 입찰을 통해 외주 업체에 이 일을 떠맡긴 서울 메트로에 많은 책임이 있겠지만 이런 노동 현실을 외면하고 생색내기식 일자리 정책이 되풀이 되는 가운데 젊은이들의 노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밥벌이가 되어버린 현실에 비통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회의 다른 곳에서는 수십억대의 수임료를 챙기는 전직 검찰 출신의 변호사가 있는 반면에 다수의 청년들은 ‘흙수저’를 물고 ‘헬조선’을 저주합니다. 교회는 세월호에서, 군대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에서 죽은 이들의 장례행렬과 마주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담고 말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6월 5일 연중 10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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