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전례학과 성공회 신학으로 공부중이신 주낙현 신부님이 성공회신문에 < 성공회 전례 여행>을 실으셨습니다. 또한 이 연재글이 분당교회의 후원으로 마련된 것이라고 밝히시고 교우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주낙현 신부와 함께하는 전례 여행(2011년 2월 ~ 2012년1월, 성공회 신문)

주낙현 신부(서울교구)는 현재 미국에서 전례학과 성공회 신학을 연구하며 <성공회 신학 – 전례 포럼>을 비롯한 성공회 인터넷 지식 프로젝트 http://www.skhcafe.org 를 운영하고 있다.

1. 연재를 시작하며 –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
2. 예배, 기도, 전례
3. 전례 – 구원과 선교의 잔치
4. 전례 전통과 도전 – 한국 성공회의 위치
5.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 –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6. 전례와 역사 – 전통과 정통 사이에서
7. 종교개혁의 빛과 그늘
8. 성공회 종교개혁 – 전례를 통한 개혁
9. 전례 운동 1 – 성공회의 이상과 공헌
10. 전례 운동 2 – 하느님 백성의 예배와 선교 공동체
11.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12.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13. 성사와 성사성 – 하느님 은총의 통로
14.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 전례와 몸의 감수성
15. “나를 기억하라” – 전례의 기억과 시간
16.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
17.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18. 성전의 두 기둥 – 성무일도와 성찬례
19. 성찬례의 인간 – 전례와 사회
20. 세상의 종말 – 전례와 선교

 

 

Posted by francischo yellows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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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교회는?
1999년 4월 세워져 알차게 성장하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진리 앞에 겸허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희생하지 않고 믿음의 지혜를 분별합니다.

우리는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을 강요하지 않고 복음의 능력을 신뢰합니다.

예배가 아름답습니다.
오랜 전통과 새로움을 조화시키려 애씁니다.
참아내는 의식이나 마음 들뜬 볼거리 아닌
주님의 살아계심과 함께하심을 누리는 예배입니다.

말씀이 지혜롭습니다. 
주님의 뜻을 밝히어 그 빛에 우리 깊은 마음과 생활을 살핍니다.
듣고 싶은 말씀도 좋지만 들려져야할 말씀은 더 귀합니다. 

기도가 높고 깊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뜻과 사랑에 우리 삶을 온전히 맡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주님의 사랑은 본래 하나이고 하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은총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뒤따르며
진리 안에서 자유로이, 사랑으로 몸 바치기를 원합니다. 

모자라고 연악한 우리이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늘 새롭게 변화하고
성숙해지는 공동체가 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마음 설레며 고백하는 진실 한 가지,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당신을 
마음 열어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Posted by 짠이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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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http://www.comngood.co.kr/article_view.htm?selected_no=709

분당교회 관할사제로 새로 부임하는 이주엽(프란시스)신부님이 참여한 대담을 옮깁니다.
[공동선]에서 주최하였는데 주제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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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기도 祈禱

이주엽 신부: 노숙자 쉼터, 살림터 소장, 성공회대에서 강의.
지관 스님: 김포 용화사 주지, 불교항쟁연대 집행위원장
최대광 목사: 정동제일교회 부목사, 사회

최대광(이하 사회): 오늘의 주제는 기도에 관해서입니다. 토마스 몰튼은 “명상, 기도나 선
禪의 수행방식에 있어서 불교에 비해 기독교가 훨씬 약하다, 불교로부터 많이 배워야 된
다”고  말합니다. 율리앙 저스틴은 기독인의 선Christian Zen, 이런 걸 만듭니다. 선禪이
라는 것이 불교에만 독특하게 있는 게 아니고 왜 기독교에서는 할 수 없느냐고 얘기를 합
니다. 하지만 사실은 불교로부터 배워야할 게 많죠. 이 신부님께서 기독교, 특히 성공회에
서 얘기하는 기도가 뭔지 말씀해 주시죠.

이주엽: 신·구교의 모습을 다양하게 가진 성공회는 기도에 관해 특별히 전통을 따로 가지
고 있다기보다 가톨릭, 개신교의 기도전통에 뿌리가 내리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
는 불교가 명상이라는 것을 통해서 깨달음으로 가고자 한다고 이해하고 있으며, 기독교에
서는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향해 기도를 드려서 신과 합일合一하는 것, 하나가 되는 것
을 겨냥하고 있다고 이해를 하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고 하잖아요? 굉장히 일인칭적인 영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지혜가 강조되고 그 지혜
를 통한 깨달음으로서 초월이 되는데 기독교는 신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나 헌신 등 애정
을 강조하면서 신을 향한 사랑을 통해서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서 불성과 하나가 되는 구조로 대비된다고 봅니다.

지관: 불교에서는 대승불교가 대중들과 결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도가 의미를 갖게 됐

지요.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를 초기 불교, 또는 원시불교라고 합니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면 자기의 죄업을 씻을 수 있다고 믿었죠. 거기에 대해서 부처께서 말씀
을 하셨지요. “만약에 누구든지 갠지스 강에서 씻고 죄업이 없어진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
겠느냐”는 거죠. 그 당시 인도인들은 속죄의 바램을 목욕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절대자에
게 기도를 한 것이죠. 하지만 부처께서는 참회와 용서 받음을 역설하신 것이죠. 그래서 부
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이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신부의 말씀처럼 불
교의 말씀의 핵심은 진리를 깨달아서 누구든지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열
반을 하신 이후 제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신도들도 부처님과 함께하고 싶은 열망이 석가모
니 부처님의 상징으로써 탑을 조성하고 탑의 유골을 모시는 사리탑을 짓고 모여서 예불하
고 찬탄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신앙으로까지 발전이 되는 거죠. 부처님 말씀
은 끝없는 성찰과 진리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부처가 되는 것인데 부처님 열반하시고 갈
구의 대상이 되는 것이죠. 출가제자들이 실천행인 수행修行과 명상을 통하여 성불하는 것
이죠.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자의 은혜와 가피력加被力을 입어 내 욕망을 이
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기도라고 봅니다. 출가제자와 일반신도들의
수행은 우열의 측면이기보다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죠.

이주엽: 스님께서 불교에서의 수행은 이원화되어 출가제자들은 명상과 수행을 통한 깨달

음, 불성으로 가는 게 목표고 일반신도들에서는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써 절대자에게 기대
는 것이 기도라고 말씀하시는데 만약에 이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불교를 절대자에
게 기대어 소원 성취로써의 기도만을 아는 그런 종교로 볼 수도 있다고…….

지관: 그래서 우리 불교는 말이죠, 흔히 이렇게 얘기합니다. 자력불교自力佛敎와 타력불
교他力佛敎. 자력불교라는 것은 실천행인 수행修行과 명상을 통하여 철저한 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 속에서, 거기에 대한 실천을 통해서 스스로가 정말 부처와 같은 경지, 부처
가 되는 것이죠. 완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은혜와
가피력을 입어서 절대자에 의지하는 거죠.

사회: 불교에서는 출가제자와 일반신도들의 수행은 이원화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기독교

에서는 깨달음과 기도라는 형태가 한 개인이나 개 교회에게서도 섞여 있다고 보이는데 여
기에 대해서 이 신부께서 말씀해 주시죠.

이주엽: 사실 기독교 내부에서도 견해가 차이가 나고 견해의 차이가 너는 이렇고 나는 이

렇다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고 죽이는 경우도 있고 중세에는 화형에 처하는 식의
증오심과 공격성을 보이기도 했지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그런 표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심층에 있어서는 굉장히 일치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고 놀라울 정도로 보편성을 보인다
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헉슬리의 영혼의 철학을 읽은 후였지요. 석가
모니 붓다라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를 창안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세대가
흘러내려오면서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이 그들을 신격화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고 교리
를 만들고 종교가 완성되게 되는데 이 와중에 등장하는 것이 기복신앙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는 불교 신자들의 의외로 많아요. “난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주위에서 상당히 세
련된 사람으로 받아들여요. 그 사람들한테는 우리 한국에서 보는 기복적인 불교가 엿보이
지 않아요. 오히려 이들은 명상을 통해서 자기 안에 참 나로써의 불성을 깨닫고자 하는 목
표를 갖지요. 일반 신도의 기복적인 모습에 대해서 비난하는 게 맞는 건지, 인간은 원래
연약한 존재니까 그런 심성이 발현되는 것도 당연할 수도 있지요, 절대자에 기대어 간다.
기독교의 경우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요. 기도를 일반적으로 절대자에 기대어 소
원성취를 위해 비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영성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관상이라
는 것이 있는데 이를 목표로 잡아본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이런 면에서 보면 개신교의 역
사가 좀 이례적이긴 합니다. 관상은 크게 봐서 두 가지 갈래가 있어요. 기독교를 플라톤
철학으로 설명해 버릇했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관상이라는 말이 나오죠. 관상이라고 하는
것을 말 그대로 합일이거든요.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의 구별이 사라져버리거든요. 하
나로 합일되는 것이 굉장히 비논리적인 것일 수도 있죠. 사실 이론적으로 보자면 굉장히
유사해요. 불교에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가 중생으로써 동시에 붓다가 되는 것처럼 기독
교도 관상을 통해서 영혼이 자기를 감각계의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알았다가 자기 본래의
신성으로, 물론 플라톤이 신성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리로 돌아가는 것을 의
미를 하거든요. 관상이라는 것을 그리스도교의 영성의 목표로 말을 할 때는 사실 좀 미묘
한 게 있는데 하나는 동방정교 같은 곳에서는 기도의 목표를 신화神化, 신처럼 되는 것이
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이 본래 신성한 거죠. 그러니까 영혼은 신과 동
족 관계에 있었던 건데 그게 영혼이 본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신성
을 다시 이렇게 회복하는 것이 영성의 목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서방교회가 정통 신
앙을 확립하는 시점을 325년 니케아 공회로 봅니다. 공회에서의 논쟁에서 동방정교의 입
장이 패하면서 기독교가 기도 생활, 수행이라는 표현을 잘 안 쓰고 수도 생활을 목표를 신
처럼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지를 않거든요. 거기에는 “건널 수 없는 존재인 신은 있다.” 이
런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불교같이 속 시원하게 “우리가 붓다 되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
지 못하는 면이 있죠. 어쨌든 관상의 목표는 신과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일치한다, 혹은
합일된다. 이런 목표를 얘기를 하지, 소원성취 등의 기복적인 것들이 그리스도교의 영성
생활의 목표로 정당하게 혹은 합법적으로 제시된 적은 없어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기복적
인 측면이 지배적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기도라는 것을 어찌 보면 신을 예배하고 찬탄한다
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소원 성취가 중심에 있어요. 한국 기독교의 영성의 역사는 많이 불
행한 거죠.

사회: 한국의 개신교가 신을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을 비워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

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형태로 기도를 하여 신을 축소시키고 우상화 시키고 욕망에 응답
해주는 존재로 생각하는. 완전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데요. 왜 그럴까요?

이주엽: 세계적인 종교들의 영적인 지혜의 전통들이 서로 쓰는 용어와 문화적 틀이 다름

에도 보편적인 내용들이 등장을 하죠.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죠. 불교에서 기독교는 타력신앙他力信仰이고 불교는 자력신앙이
라고 하는 데 위빠사나에서는 무상공부, 무아無我를 얘기하는데 그러면 대체 누가 자기
힘으로 그것을 성취했다고 하죠? 내가 지금은 깨달았다라고 해도 여전히 나가 있잖아요.
깨닫기 이전의 나가 여전히 있잖아요. 기독교의 영성은 기본적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불
교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이런 차이점이 불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기도를 소
원성취로써의 수단으로 대중적인 차원에서 제시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신과의 합
일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죠.

지관: 감정, 생각들을 다 비워 내어버리는 상태가 무상 공부의 목표지요. 무량수경에 보

면  열두 가지 관상법이 있는데 관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탐貪·진嗔·치癡, 
욕심과 쓸 데 없는 감정들, 또 잘못된 생각들을 비워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청정하고
피해 없는 가운데서 붓다의 경지에 들어가는 그런 수행법들이라는 거죠. 기도가 일방적으
로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죠. 석가모니 부처님
이 깨달은 자의 눈으로 주변의 인도인들의 모습을 봤을 때 너무 어떤 주·종, 상·하의 개념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너무 자학하고, 포기하는 모습과 무조건 미래지향적인 ‘에이, 지
금은 이렇지만 다음에는 좋게 태어나겠지. 좋겠지’ 이런 모습에 대해서 당신께서는 철저
하게 경계를 하셨고 “이 세상의 모든 주인공은 나다. 행복과 불행의 주체는 나이며 천당
가고 지옥으로 가는 것도 나다”라는 기존의 인도인들의 사상에 절대적인 반기를 드는 혁
명적인 선언을 하셨죠. 하지만 세속적인 욕망 성취를 떠날 수는 없다는 거죠. 급한 사람들
에게는 근본적인 해결책보다는 이 문제를 해결을 해야 되는 차원에서 절대자에게 의지하
고 싶고 기대고 싶은 게 민중들의 가장 소박한 욕망이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기도하며 절
대자에게 의지하여 타력적인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불교에서
는 불성과 철저하게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
이 바로 어떤 일상적인 그런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명상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얻어 대
중들과 나누는 것이죠.

이주엽: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 봤을 때 신을 절대라고 하잖아요. 신을 절대라고 하는

‘제2가 없는 1자다’ 라는 이런 표현이 있거든요. 절대와 상대로 이해하는 양극화 할 수 있
는 것은 이미 절대가 아닌 것이죠. 이게 절대를 바라보는 어떤 또 다른 제2의 어딘가에 자
리가 있어가지고 이게 절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절대가 그 순간은 사실 절대
가 아닌 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 ‘신이 유일하시다’ 이런 것은 요즘 개신교에서
용법을 보면 사실은 기독교 신자들이 믿기로 그만 못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경쟁 상대
가 되는 다른 신들이 있어요. 부처도 있고, 알라도 있고… 그런 신들이 있는데 내가 이 많
은 신들 중에 이것들은 다 못하고 내가 우리 신이 최고야 내가 이 여자만 제일 사랑해 뭐
하는 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을 유일 신앙인 것처럼 말을 하는데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서 유일신을 그런 식으로 이해를 해본 적이 없고 유일자는 말 그대로 일자라고 하는 것 입
니다.
원래 플라토닉 철학에서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정립에 굉장히 영향을 준 위디오니스라든
지 플로티노스라든지 그런 신 플라토닉 철학에서 1자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체 모든
것을 다 담은 그래서 그 1자가 무수히 많은 이 모습으로 자기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되어 있지만, 스님 앞에서 불교 이야기를 하려니 민망하지만 ‘공즉시색 색즉시공 은
색이란 무상하다, 그래서 공에 집착해도 안 되고 공과 색이 둘이 아니고 사실은 불이고 그
중에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체의 열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 귀에는 그게 굉
장히 기독교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관: 김포에 친한 목사가 계시는데 그 분이 권사, 집사와 3주 전에 용화사에 오셔서 점심

으로 비빔밥을 잡수시고 저랑 차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그런데 저와 목사는
잘 통하니까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권사와 집사는 잘 모르시니까 무슨 말
끝에 “저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어요. 그 분들이 깜짝 놀라
요. “앉으나 서나 항상 저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제
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님’ 이라고요. 그리고
저는 “그 분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나의 주인, 나는 그 분의 종”이라고 말씀을 드리니 그
분들이 가만히 계세요. 내가 모시는 주인님, 내가 모시는 주님, 내가 종으로 살아갈 수밖
에 없는 그 님은 어떤 님이냐 ‘진리 님’이고 진리 님은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 절대로
둘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밖에 없는 그 님을 막 부르기가 송구스럽고 막 부르기가 미안
하니까 그냥 선생님, 누님, 아버님 하듯이 님자를 써서 존칭을 써서 그냥 하나님이라고 하
는 것이고 그러니까 교회 가도 성당에 가도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제자입니
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죠. 기도라는 말 속에
는 갈망, 갈구, 소원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불교에
서 늘 하는 네 가지의 갈망이 있습니다. 일반 신자들의 공통된 네 가지 큰 서원을 우리는
사홍서원이라 합니다.
 첫째,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일체의 중생, 즉 생명체를 구제하기 위하여 깨달
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겠다는 맹세.
 둘째,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다함이 없는, 인간의 그 많은 번뇌를 끊겠다는 맹
세. 셋째,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광대무변한 불타의 가르침을 모두 배워 깨닫겠
다는 맹세.
넷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가장 존귀하고 그 이상 뛰어난 것이 없는 불도를
닦아 깨달음에 이르러 성불하는 것인데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하나님이 되어야 되고
진리와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기도라고 하는 그 의미가 개인의 소박한 소원 성취를 위한 일종의 기복의 형태로 가
는 기도냐 아니면 정말 사홍서원처럼 나와 절대자가 하나가 되고 내가 부처가 되고 모든
중생들이 하나를 안아서 가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나와 부처가 둘이 아닌 그런 마음속
에서 소원을 담아서 가는 그런 기도냐. 이게 좀 약간 차이가 있는데 결국 그것은 제가 처
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출가수행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될 그 소원 기도의 마음이 곧 사홍
서원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런 것들이 우리 개개인 일반인들, 세속인 또
는 지금 급하게 해결해야 될 소원을 가진 분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이것은
좀 뒤에 가고 먼저 해야 될 일들이 있으니까 그런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합니다.

이주엽: 사람들이 종교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 같으면 부정적인 의미에서 신비주의라

고 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소리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대학 1
학년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뿐만 아니라 과학이든지 어떤 분야이
든지 크게 봐서 세 가지의 요소가 있어야 되는데 하나는 가르침이 있어야 되고 예를 들면
천문을 관측을 해도 망원경을 대고 어떤 각도로 보면 어떤 별이 보인다고 가르쳤더니 그
가르침을 따라서 망원경을 그 각도에 따라 봤더니 실제로 그 별이 보이더라. 그러면 내가
본 이 별이 네가 본 그 별이 맞느냐는 경험의 대조와 비교를 폭넓게 해서 검증반증이 가능
하고 크게 봐서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으므로 해서 가르침이라는 것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믿을만한 것이 되는 것이고 종교에 있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며, 내가
불교의 길을 가지 않아 모르겠지만 거기서 어떤 길을 가르치고 거기서 근본체험이라 할
수 있는 견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소위 말하는 먼저 깨달았다
라든지 선지식 철학을 통해서 검증받는 이런 시스템이 있는 것으로 보이더라.” “이래도
이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비슷한 얘
기로 기독교에서도 사실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체험이 있는데 기독교
가 제시하는 수행할 때는 쓰지는 않지만 어쩠든 그런 길을 가면 결국은 그 체험에 도달하
고 공동체가 그것을 검증하고 이런 시스템이 있는 건데 그랬을 때 기도라는 것이 첫 번째
요소에 해당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열심히 하세요”라고 말하
죠, 하나의 길로서. 길을 가르쳐서 어디에 도달하게 하느냐 하면 여기에 도달하게 해주어
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런데 그것을 생각해 보면 잘 모르겠습니
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도 생각을 해요. ‘아버지’는 사실 거기서 모든 유한한 있음들이 나
오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무로부터 창조라는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래서 유영모라는
분이 ‘없이 계시는 하느님’ 이렇게 해서 신이라는 절대 유일은 모든 있음이 나오는 근원자
리를 아버지라 그러는데 예수님이 내가 거기에 돌아가서 사실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러
면 내가 신이다 내가 아버지다 이렇게 얘기를 해도 될 텐데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분이 내
가 신이라거나 내가 아버지라고 얘기를 하지 않고 그 분과 나는 하나다 둘이 아니라고 말
씀을 해요. 제가 알기론 불교에서도 그냥 굳이 하나라고 얘기를 하지 않고 불이라고 얘기
를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렇게 놓고 보면 전체의식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어떤 개
체성이 있는 거죠. 아까 무아에 대한 설명을 하실 때도 뭐 이런 것을 딱히 집어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영원불변의 본체의 실체가 없다, 이런 것을 깨달았으나 지극히 일시적인 현
상이라도 있잖아요. 근데 기독교에서 같아서는 신을 섬기는 종으로서 나라는 의식으로 표
현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랬을 때 제가 교회 내부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아버지와 나는 하
나다’라는 이 분의 이 근본체험에 기도가 우리를 이끌어가야 될 텐데 현실에서 기복신앙
요소로써만 가고, 저는 뭐 우리가 불쌍한 중생으로 사니까 때로는 힘들면 “돈도 좀 벌게
해주십시오. 좋은 여자를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 자식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도 필
요할 거라 생각을 해요, 폭넓게 보면. 그렇기는 하지만 근본 핵심은 늘 예수가 그랬던 것
처럼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근본체험을 겨냥하는 것이 기도고 바로 그런 기도를 관상기
도라고 얘기를 하는 것이거든요. 관상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인데 신
과 하나가 되는 신이 된다고 말하지 않고 신이 나를 통해서 그 분과 나는 둘이 아니고 하
나다, 어쩠든 내가 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생각합니다.

지관: 말씀을 들어보니까, 결국 기도의 진정한 의미는 같은 것 같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

이죠. 하나가 되는 것인데 다만 기도란 의미를 너무 일반화시키다보니 개인의 기복행위
로 되고 맙니다. 제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소원성취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싶다면 여러분들 어떻게 하느냐, 마음을 잘 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잘 쓴다는 것은 부처님 시킨 대로만 하면 됩니다. 부처님이 시킨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
에 내가 뭘 이루어주세요, 하게해 주세요. 하는 것이지 여러분들이 부처님이 시킨 대로 하
고 그렇게 마음을 잘 쓴다면 따로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
서 여러분들 앞으로 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
렇게 살겠습니다라는 다짐의 기도를 한다면 여러분들은 점점 기도할 일이 없어질 것이고
아마 기도를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회: 교회나 사찰을 보면 무슨 수험생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극복해야 될 부분인데 그

런 것들을 종파에서 내 놓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돈이 들어옵니다. 제가 목회활동
을 다년간 해 본 결과에 의하면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오른손이 한 것 왼손이 모르게 하
라 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바꾸어야 할까요?

지관: 우리 사찰에서도 일요가족법회를 합니다. 늘 강조하는 것이 뭐냐면 “부처님은 전지

전능하지 않다는 것 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무리 부처님에게 빌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 앞두고는 기
도를 한단 말이죠. 그랬을 때 이것은 왜하느냐, 신도들의 요구사항들이 있죠. 그러면 “여
러분들이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공간,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여러분들이
하세요.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는 부처님도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여러
분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가 스스로 생각을 하면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을 드
립니다. “우리 아들딸이 내가 엄마로서 부모로서 해야 될 일이 뭔가 자각하고 또 자각한
것을 실천하는 그런 시간․공간 백일기도면 백일을 그런 시간이나 공간으로 다짐하고 실
천하는 그런 기회로 삼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요. 기복적인 기도를 우리 종교인들
이 다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어떡하면 좋은 쪽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
이 저희들한테 주어진 역할이 아니겠는가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이 그러셨기 때문에 백일
기도 안하고 제사도 안 지내고 천도제도 안 지내고 49제도 안 지내고, 그것은 출가할 승려
가 해야 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죽고 난 뒤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일반인들이 해야지 우
리 출가제자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고 있거든요. 왜 일반들의 요구사항을 종교인
들이 그것을 거절 할 수 없으니까요. 다만 그것을 배제하기보다는 잘 포용을 해서 정말 근
본적인 뜻으로 좋은 뜻으로 발전시켜 나가게 하는 것이 그래서 그 분들도 밥을 짓는 행위
가 아닌 그런 것을 통해서 복을 짓는 행위, 그런 행위를 통해서 덕을 쌓는 행위로 그래서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평화롭고 안정되는 쪽으로 우리가 유도해 나가고 이끌어 나가는 것
이 종교인들의 역할인데 개중에는 그렇지 못한 종교인들이 꽤  많이 있어 참 이 나라가 지
금 이렇게 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이주엽: 저는 사실 소원성취를 비는 차원으로써 기도에 대해서 제 개인적으로 관점이 여

러 번 바뀌어 왔는데 지금은 따뜻하게 볼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실 논리적으
로 잘 해결을 보고 있지는 않는 것 같아요. 어쨌든 근본적인 중심을 놓쳐가면서 그런 것
에 매몰되어 상황이 이렇게 지배적이냐 하며 언짢게 생각하며 인간 삶에서 그런 차원이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종교 안에서 어떤 체험들이 있잖아요. 여러 가지 체험을 가지고
간증도 하지만 사실은 매 단계에서 그런 모든 체험들의 상태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
니다. 그러면 그 체험을 가지고 하여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그 의식수준에 맞춰서 해석
될 수밖에 없다는 거죠. 기독교가 지금 처해 있는 의식수준이 지금 인류의 80%가 이기적
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얘기를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아부터 확실하게 세
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로 살지 못해 가지고 남이 맞춰준 정답에 따라 살고 부모가 규
정한 대로 따라 우울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한테 언제 자기를 가져본
적이 없는데 자기를 내놓고 더 큰 무언가를 위해 섬기는 삶을 살아보라든지 혹은 내 새끼
만 잘 되라고 기도하지 말고 이 세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다면 이거  씨알도 안 먹히
는 소리거든요. 자기부터 챙기고 자기감정과 느낌 욕구를 존중하는 단계를 거치라고 하듯
이 종교에서도  과도기적으로 기복적인 면도 조금 허용할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주적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안 되니까 그럴 수는 있지는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불교도 마찬가지지만 기독교 안에서도 예수를 따르는 핵심을 놓고 그것을 겨냥 하게끔 기
도하게 해야지요. 하지만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부분들이 기복에 고착되어 있고, 중심을
상실한 체 요즈음 영성, 관상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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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주엽 2010/03/29 21: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엥, 이 글이 여기 실려 있는 줄 이제 알았네요. 이거 공동선측에서 축어록을 꼼꼼이 풀지 않아서 완전히 잘못 옮긴 대목이 몇 군데 있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한 대담입니다. 원래는 대담내용을 글로 옮긴 다음 대담자들에게 보내서 확인을 받는 절차가 있는데 발간일에 몰려서 급히 냈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그런가보다 하고 신경을 안 썼는데 나중에 발간된 걸 보니 완전히 엉뚱한 내용을 담은 데가 두어 군데 등장하더군요. 우선 큰 거만 짚자면 "기독교 영성신학쪽에서 보자면 관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목표로 잡아본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는 완전히 뒤집힌 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늘 관상을 목표로 해왔다는 얘기를 한 거였고요. 그 밑에" 니케아 공의회에서 동방정교파가 패배를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무슨 망발인지! 동방과 서방으로 분열한 것은 6세기의 일이고 제가 했던 말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의 패배를 언급한 거였는데 축어록을 푸는 사람이 대충 옮긴 모양입니다. 또 하나는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을 언급한 건데 위에는 "영혼의 철학"이라고 해놨네요.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들어...


 

재난의 현실을 사랑의 현실로


글쓴이 : 임종호신부(분당교회 관할사제)

지난 1월 12일 중미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 규모 7.3의 강진이 발행해 15만명이상이 사망했습니다. 대한성공회는 지진참사로 인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는 아이티 희생자들을 돕고자 긴급구호기금을 모으는 중입니다. 

거대한 자연재난을 겪으며 우리 신앙인은 많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피해상황의 비참함과 아울러 도무지 그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신정론(神正論)”의 문제, 곧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종종 “하느님은 형편없이 무능한 신이거나, 아니면 자비롭지 않고 냉혹한 신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심각한 의심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머리로 지어내는 답으로는 이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최선의 답은 정직하고 신실한 욥의 경우처럼 “살아계신 하느님”을 직접 대면하는 데서 찾아집니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은 바로 “성육신(成肉身)” 사건을 통해서 가능해졌습니다. 성육신 신앙은 “성부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성자 예수님을 온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나게 하셨다”는 믿음과 고백입니다. 이 믿음의 한 가지 중요한 초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가 단지 죽은 후의 저 세상 낙원을 위해 임시로 지나쳐 가거나, 제멋대로 망쳐도 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세계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서 아름답다 감탄하신 귀한 창조물이요,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터전이며,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가꾸어할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성공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을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티의 재난은 대규모 지각변동, 곧 지진의 결과입니다. 미리 준비하고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극도로 빈곤한 아이티의 형편 탓에 더더욱 많은 이들이 속수무책으로 재난에 노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구태여 신앙적으로 해석하자면 이 재난은 “하느님의 저주와 징벌”이거나 아니면 보다 더 선한 결과를 주시기 위한 “하느님의 시련과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도 참혹한 현실 속에 있는 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아이티의 재난은 우리 모두가 “살아계신 하느님”을 대면하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 한 가운데에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인간으로 나셨고 인간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의 영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진으로 죽고 다치고 굶주리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고, 오늘 이곳에서 그 소식을 들으며 진심으로 아파하고 슬퍼하는 우리와도 함께 하십니다. 

이런저런 억지 해석을 내려놓고 아이티의 고통을 우리 마음 속에서 함께 고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을 때 우리 구원의 진정성은 확인됩니다.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이것저것에 집착하는 좁은 태도를 넘어서고, 예수님께서 이 세계 속에 펼쳐가시는 “하느님 나라”, 그 사랑의 왕국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얼마나 모일지, 또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늘 아이티의 그들을 향한 우리의 작은 관심이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손길이요, 우리 서로에게 허락된 구원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재난의 현실을 사랑의 현실로 만드는 일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아이티의 재난구호에 대한성공회의 모든 이들이 크거나 작거나 진심어린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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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unny.com BlogIcon montreal florist 2010/04/25 0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글 이네여

    • 기쁨의나무 2010/04/25 2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공감과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늘 기쁘고 행복하시길!
      주님의 진리 따라 귀하게 쓰임받는 복된 삶이 되시길!

한국내의 다종교사회는 그 구조상 아주 복합적이고 미묘한 여러 상황등으로 갈등의 소지를 내포한 채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갈등 구조를 종교간 대화를 통해 이해하고 해결해나가는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이에 그동안 가슴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이웃 종단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을 묻고 이를 KCRP(한국종교인 평화회의) 종교간 대화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계신 위원님들과 종단 관계자분들을 통해 속 시원한 답을 듣는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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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성공회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신교단으로 분류하지만 실은 가톨릭과 유사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사실인가요?

A. 성공회는 기독교의 한 교파입니다. 영국 국교회인 영국 성공회와 서로 상통관계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말합니다. (영국)성공회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분명 “개신교단”으로 분류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상 많은 성공회 사람들은 자신을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현상은 영국 종교개혁의 독특한 성격에 기인합니다.

중세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극심했던 유럽대륙에서 루터교나 개혁교회(장로교)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제도를 모조리 부정하고 대항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섬나라인 영국에서는 교회의 부패와 타락이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았고 종교개혁의 초점도 교회 자체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아니었습니다. “민족국가로 성장하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강화하고, 천주교 추종세력과 개신교 추종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국민 교회(National Church)를 만들어 내려는” 정치적 동기가 강했습니다. 따라서 영국 성공회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존중하고 이어가면서 루터와 칼빈의 개혁적 입장을 결합하는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 성공회의 중요한 신앙적, 신학적 전통이자 특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가 단지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일파이기보다 “개혁하는 가톨릭교회 (Reforming Catholic Church)”라고 주장합니다.
교파적 입장을 벗어나 생각해보면 실상 “개혁”과 “가톨릭(전통)”은 전혀 상반될 필요가 없고 도리어 서로 보완해야 마땅한 개념들입니다. 어떤 교회이든 개혁적인 동시에 가톨릭적인 교회일 수 있고 실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성공회는 사회적으로 훌륭한 일을 많이 하지만 교인 수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선교를 성공회교단의 특징으로 이해해도 될는지요?

A. 한국성공회는 작은 교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합대학교를 운영하고 활발한 사회선교를 실천하며 교회일치운동과 종교평화운동에 참여합니다. 한국성공회의 사회적 영향력이나 건강한 교단으로서의 이미지는 활발한 사회선교에 힘입은 바 큽니다.

하지만 성공회 교단의 특징을 사회선교로 보는 것은 매우 좁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성공회가 실천하는 사회선교는 단지 대상이나 영역이 “사회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회과학적 인식이나 인본주의(휴머니즘)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회는 이른바 성육신(成肉身) 사상, 즉 신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다고 하는 믿음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 세상과 삶의 의미를 죽은 후에 타계의 낙원에 들어가기 위한 목적과 과정으로 축소하지 않고 이 세상이야말로 신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선교의 현장임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또한 교리나 제도보다는 “전례적인 영성”을 중시하는 교회라는 점이 성공회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성공회의 사회선교는 실상 성공회가 중시하는 이러한 성육신 신학과 전례적인 영성에서 비롯한 실천입니다.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당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례를 통해 경험하고 이를 세상에서 실천하는 일이 사회선교로 이어진 것입니다.
성공회는 사회선교를 중요시하지만 무엇보다 교회로서의 본분을 지키고 세상을 향해 영적인 지도력을 지키고 발휘하고자 합니다.


Q. 성공회는 여성사제, 수녀사제, 동성애 주교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성공회 신학에서는 그런 제도나 현상들을 어떻게 설명하나요?

A. 성공회는 “개혁하는 가톨릭교회(Reforming Catholic Church)”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과 제도”를 존중하고 이어가지만 늘 “지금 이곳에서” 실현되는 복음의 현실성을 고민하여 개혁의 내용으로 삼습니다.

여성사제 서품 문제는 세계 성공회 안에도 적지 않은 갈등과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결국 “여성 성직을 반대할 신학적인 이유는 없다...”는 결의가 합의되어 많은 여성사제들이 배출되었고 긍정적인 사목적 결과를 얻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공회가 신적인 계시를 바탕으로 사회의 변화를 선도했다기보다는 실은 사회적인 변화 속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신의 뜻을 발견하고 수용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미 여성의 역할이 사회 곳곳에서 전통적인 차별과 장벽을 넘어서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 성직서품 문제는 여성성직 문제보다 더 심각합니다. 성경이 동성애를 분명히 문자적으로 죄악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안이 되는 동성애의 문제는 “성적인 취향”이 아니라 “성적인 지향”의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로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간극이 있습니다만 동성애자의 존재는 서구사회의 현실입니다. 미국 성공회는 말하길 “동성애자들도 신의 사랑과 자비를 구하는 이들이며 그들에게도 신의 영(성령)이 함께 함을 경험하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성공회 안에 동성애자 주교서품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습니다.
성공회의 신학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에 머물지 않고 성경이 전하는 세계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통전적으로 살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이 세운 모든 경계와 장벽을 초월함을 알려주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보다도 실제 사람들의 삶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화를 이루도록 돕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성공회 신학의 관심이고 전통이라 하겠습니다. 전통이든 개혁이든 모두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큰 뜻에 부합해야 할 것입니다.  (답변: 임종호신부/성공회 분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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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을 위한 기도(신자들의 기도)

 지난 주일 주낙현 신부님께서 특강을 통하여, 우리 성공회는 골방에 앉아 혼자 기도하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모여 기도하는 교회이며, 여러 가지 기도문이 성공회기도서에 훌륭히 망라되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새삼 기도서를 다시 읽어 보면서 신자들의 기도를 준비하였습니다.

ㅇ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주께서는 교회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나이다. 간절히 비오니, 우리에게 진리와 사랑의 빛을 더하여 주시고, 새 생명의 힘을 주시어 주님을 온전히 섬기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 주소서. 또한 성직자와 신자들이 한 마음과 한 믿음으로 거룩한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 

 주님. 진리와 통일의 은총으로 항상 온 교회를 감화하시어, 모든 성직자 특별히 우리 주교 김근상 바우로주교와 모든 교우들이 서로 화목하며 합심하여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 +

ㅇ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에게 이 좋은 땅을 유산으로 주셨나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오니, 우리로 하여금 항상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주님의 뜻을 기쁨으로 행케 하소서. 이 땅에 충직한 근면과, 건전한 배움과, 순결한 행동이 넘치도록 축복하시며, 우리를 폭력과 알력과 혼란에서 구하시고, 교만과 무례와 모든 악습에서 건저주소서.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시어 하나로 통일된 국민 되게 하소서.  또한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시어 우리나라에 정의와 평화를 깃들게 하시며, 주님의 법에 복종함으로서 땅위의 모든 국민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번창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이 넘치게 하시고, 고난을 당할 때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이 병들지 않게 하소서.

 주여,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특별히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인도하시어, 악행과 악습을 막으시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주소서. +

ㅇ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 합시다.

 전능하시고 지극히 자비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당한 모든 사람들을 항상 기억하라 하셨나이다. 구하오니, 가정이 없는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 노인들과 병든 사람들, 그리고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을 도우시어 몸과 정신의 상처를 낫게 하시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소서. 

 주여, 이 변화 많은 세상에서 모든 근심하는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건져 주소서. +

ㅇ 사랑이신 주님

 2010년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생명과 건강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암투병중이신 이해인 수녀님이 지난해 12월에  “오늘 이시간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며 쓰신 글이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아 올 한해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고자 인용해 봅니다.
 
 첫째, 무엇을 달라는 청원기도 보다는 이미 받은 것에 대한 감사기도를 더 많이 하려 합니다. 그러면 감사할 일들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나 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의 모습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둘째, 늘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일들을 놀라워하며 감탄하는 연습을 자주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상의 삶이 매순간 마다 축제의 장으로 열리는 느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는 것도, 떠오르는 태양을 다시 보는 것도,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얼마나 큰 감동인지 모릅니다.

 셋째,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여유를 지니도록 애씁니다.

 넷째, 속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는 흥분하기보다 “모든 것은 다 지나 간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질고 순한 마음을 가지려 애씁니다. 인간관계가 힘들어 질 적에 “언젠가는 영원 속으로 사라질 내가 대체 이해 못할 일이 무엇이며 용서 못할 일은 무엇이냐”고 얼른 내 마음을 바꾸면 어둡던  마음에도 밝고 넓은 평화가 찾아옵니다. 
   

 주여, 이렇게 살아 갈수 있기를 기도하는 우리의 소원을 살피시고 주님의뜻대로 이루게 하소서. +

ㅇ 별세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별세한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 

ㅇ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나이다.

                                                                                        2010. 1. 3   김태우(암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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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viamedia.or.kr BlogIcon 주낙현 2010/01/09 1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함께 나눈 이야기를 지나치지 않으시고, 이렇고 곧바로 실천에 옮기시는 우리 암브로스 교우님을 보고 감명을 받습니다. 우리 기도서엔 참 좋은 기도가 많은게 확인되시지요?

    그런데 "교회와 사회를 위한 기도"에 기도서에 나오는 다른 기도를 이렇게 적절하게 옮겨와 적용하는 방법은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바였습니다. 깨달음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가족은 잘 돌아왔습니다. 지난 번 방문 때 환대해 주시고 경청해주신 분당 교회 교우 여러분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 Favicon of http://viamedia.tistory.com BlogIcon 임종호 2010/01/09 17: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부님! 이번 여행동안 머리와 가슴과 어깨가 모두 무거우셨지요.
      그 무거운... 걸음 마다에 주님께서 사랑으로 동행하심을 믿습니다.

      신부님의 요번 강의 말씀, 우리 공동체에 특별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 우리 교구안에 신부님들의 학업과 성공회신학 발전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는 모임이 꾸려지길 기대합니다.

      올 한해도 정진하시고 신부님과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주님의 평화!


*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여기 분당지역에 당신의 교회가 있게 하신지도 어언 10년이 넘었습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나눌 수 있는 믿음의 큰 터전을 주셨음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희들은 새로운 10년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숙연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때 입니다.
우리 분당교회 전 교우들은 합심 협력하여 당신 보시기에도 아름다운 교회로 더욱
알차게 가꾸어 나아가고자합니다.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서른 세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항상
기억 하며 우리 모두 굳건한 신앙으로 뭉치는, 그런  믿음의 공동체를 소망합니다. 
분당교회와 대한성공회를 더욱 힘써 가꾸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도록, 저희들에게 믿음의 열정과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 진리와 통일의 은총으로 항상 온 교회를 감화 하시어, 모든 성직자 특별히

우리 주교 김근상 바우로와 모든 교인들이 서로 화목하며 합심하여,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써,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소서.  

*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전쟁과 테러가 없는 세계평화, 특별히 정정이 불안한 중동,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헐벗고 굶주리는 자와 외로운 자가 없는, 국민이 골고루 잘사는 복지국가, 특히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나라로의 발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여,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 특별히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인도 하시어, 악행과 악습을

막으시고 진리와 정의를 지켜주소서.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과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님!

병환 중에 있는 윤태헌베드로, 문한나, 박미리암, 김복진테레사, 강마리아, 장마가렛, 김마가, 지요안나, 지안드레, 구기설프란시스, 황요안나, 김안나, 조준행신부, 이천환주교와
이 밖의 모든 환자들의 건강회복과 치유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주여, 이 변화 많은 세상에서 모든 근심하는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건져주소서.

 
사랑이신 주님!

작은 교회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성가 연습에 땀 흘리고 있는 우리 교회의

성가대와 ,늘 교회 대소사에 앞장서서 봉사하고 있는 어머니회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의 작은 노고도 기억하시어 칭찬해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옵소서.
또한  오후에는 “생명사랑 나눔 농장”에서 가을 추수 잔치가 있습니다.
올해도 풍성한 가을겆이를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농장 일꾼들은 이년여의 농사일을 통해, 이제 서야 어렵사리 자연과 생명과 땀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크나크신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가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분당 교회 교우 모두가 농장에 나와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느껴보면서,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감사의 한마당이 되길 기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살피시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게 하소서.   

* 별세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주여 부활을 기다리는 모든 별세한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하나이다.

                                              2009.10.25.   김태우 (암브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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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성공회문장; 현재 대한성공회관구문장. 떡깔나무잎 13개는 조선 13도를 상징/ 성공회 대학로교회 성당 스테인드글라스(김용철 교수작품)에서 부분촬영


                        성공회를 말하기 위한 몇 가지 질문

감사하게도 세상은 넓고 교회는 많습니다. 교회건물이 많은 것은 물론 가지가지 교단과 교파도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성공회는 본교회나 신자의 수가 많은 편은 아닙니다. 작은 교세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교회성장 방안이 다각도로 모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성장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필요한 일은 성공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확인하는 일일 것입니다.  많고 많은 다른 교단 교파와 우리 성공회가 다른 점이 무엇이고 어떤 장점과 매력이 있는지를 우리가 먼저 정직하고 분명하게 소통하고 공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회의 자긍심을 말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고자 합니다.

많은 이들은 성공회의 자랑을 전례적인 교회인 점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반박하기를 전례라면 로마가톨릭이나 정교회도 훌륭하지 않느냐고 합니다. 우리 성공회의 전례신학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전례의 의미, 전례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참된 인식과 자부심을 나누고 있을까요?

많은 이들은 성공회의 자랑을 활발하고 선도적인 사회선교에 둡니다. 다른 이들은 반박하길 이제 사회선교는 복지국가의 몫으로 되지 않았는가 말합니다. 그리고 재력 있는 보수교단들도 활발히 사회선교에 참여하는 현실을 말합니다. 사회복지단체나 국가제도와 다르게 성공회가 하는 사회선교에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 교회의 사회선교에는 어떤 신학적인 중요성이 있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성공회의 자랑을 모든 신앙의 형태를 포용하고 관용하는 태도에 있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공회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성공회의 간판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교파적인 집착이 없다는 것과 교회일치운동에 공헌한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에는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회로서, 또 서구 그리스도 교회의 주류로서 가지는 자신감과 여유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공회야말로 이미 튼튼한 기초 위에 서있는 가장 교회다운 교회라는 자긍심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한국사회에서 아직 작은 규모의 교단인 성공회가 이런 주장을 그대로 하는 것이 과연 유용하고 설득력이 있는 일이 될까요?


어떤 이들은 한국성공회가 진보적이라는 점을 자랑하고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정치 참여적으로 보이는 점을 우려합니다. 어떤 이들은 평화롭고 점잖은 교회 분위기를 사랑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가 예언자적인 사명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걱정합니다. “모든 것이 정치이지만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는 경구대로 교회의 사명은 세상의 정치를 인정하되 그것을 초월하는 신앙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살피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 신앙은 정치적인 동시에 탈정치적입니다. 성공회의 태생과 발전이 현실의 민족주의와 사회안정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맞물리는 역사가 있기 했지만, 현실의 당파를 정략적으로 편드는 수준의 정치참여를 성공회는 단호히 거부해 왔습니다.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섬기는 우리 성공회의 신학은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일까요?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어떤 대답을 정리하고 있는 것일까요?
스스로 반성의 물음을 던지고 대답을 정리하는 것이 성공회 신학의 과제입니다. 지금 한국 성공회에서 성공회 신학이 우리의 문제를 반영하고 우리의 대안을 모색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요? 혹시라도 한 편에는 현장 없는 현학적 신학의 태도가 한편에는 신학무용론적인 태도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공회가 가장 교회다운 모습으로 이 땅에서 아름답게 성장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성서와 이성과 전통에 근거한 우리 성공회 사람들의 대답이 풍성하게 찾아지고 정리되고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2009. 10. 4/ 임종호/분당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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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cho2002@yahoo.co.kr BlogIcon 조석태 2009/11/01 09:4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성공회에 대한 크게 3가지 질문을 던저 주셨다고 봅니다
    1.전통과 전례 / 2. 나눔 / 3. 중도
    대체로 이해을 하며 나름대로 정의을 내려 보려고 하나
    딱 흔쾌하게 정의가 내려지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 평신도들이 쉽게 이해 할수 있는 정의을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탁 합니다
    하느님 사업에 함께 동참이 될수 있게금 기도 드리겠습니다

  2. 임종호 2009/11/01 23: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조석태 교우님, 반갑습니다.
    진지하게 응답을 해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

    제가 정리된 답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계몽적인 차원으로^^ 글을 쓰고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은 아닙니다.

    성공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는
    한국성공회만의 고민이 아니라 세계성공회의 영원한 물음이어서
    그 누구라도 간단히 답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봅니다.

    다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물음을 묻는 일이
    단순히 담론 자체를 즐기거나 학식을 과시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속해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어떤 교회공동체를 이루며 어떻게 복음을 살아가는가와
    연결된 선교적이고 사목적인 관심사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성공회의 정체성은 곧 우리의 주체성(주관성이 아니라^^)을 통해
    이루어져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말씀하신 주제들을 쉽고도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더 많은 분들이 각자 생각을 밝히고 서로 의논하고 함께 다듬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다른 분들이 이런 주제로 많은 글을 올려주시길 기대하며
    원론적 필요성을 말씀 드린 것인데...
    교우님께서 제게도 직접 정의를 내려보라고 말씀하시니...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일간 제 나름 시도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속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3. Favicon of http://stcho2002@yahoo.co.kr BlogIcon 조석태 2009/11/08 0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신부님과 함께 하시길
    기도 드리겠습니다



                             남북 화해를 위한 기도 운동을 요청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의 환경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제가 안 좋아서 경제에 일가견이 있다는 인물을 지도자로 선택했는데, 그게 좋아질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맘몬적 경제 논리로만 모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하다 보니, 그것과 맞물려 있는 정의, 평화, 민주주의, 주권 재민의 문제, 생존권, 역사, 교육, 인권, 언론의 문제, 공정성, 국가폭력, 생명의 문제 등 수많은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개발독재의 야만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야만의 잔재들을 문신으로 새긴 천박한 폭력적 경제 논리가 우리의 삶과 영혼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던 개발독재의 망령이 국토 개조란 허망한 이름으로 이 강토와 생명을 향해 폭행을 가하고 있습니다. 맘몬에게 얼을 빼앗긴 자들이 역사와 생명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화해는 멀어지고 갈등이 깊어갑니다. 한때 개선되었던 남북관계가 대결 상황으로 악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과거 암울했던 냉전 시대로 다시 돌아간 듯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일그러진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이런 시대 상황에 대해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공생애 처음 광야에서 맘몬의 손짓을 물리친 서른 살 청년 예수를 생각해 봅니다. 부끄럽습니다! 우리(교회)는 그 맘몬의 손짓을 현실론과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교회의 삶의 자리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맘몬이 던져놓은,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까’ 라는 현실론의 올가미에 걸려들자마자,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뒷전으로 밀쳐놓는 큰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몹시 부끄럽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원죄이며, 우리(교회)가 안고 가야 할 시대의 고통입니다.

맘몬주의가 세상의 주도권을 차지하면 곧바로 평화의 문제가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최근 한반도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남북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고, 평화가 한없이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일구었던 화해의 분위기가 와해되는 상황을 목도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평화를 위해 부르셨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깨어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일은 평화를 이루는 일에 기도의 힘을 합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지금까지의 죄책에 대한 고백과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정의와 평화, 평등, 자유의 근본적인 가치를 불편해 했던 이기심과 안일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물질적 가치관에 기초한 맘몬주의를 혁파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먼저 남쪽 내부에 화해와 용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남과 북 화해 이전에 남쪽 내부에 오래도록 얽힌 증오의 그림자를 거두어내는 화해와 용서를 위한 노력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남과 북의 화해의 문제는 남과 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남쪽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포용과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고귀한 일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 교회 안에 생각의 차이를 담아 들을 수 있는 신학, 신앙적 아량이 필요합니다. 어떤 편향도 담아내는 큰 그릇(담론)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넷째, 생명의 문제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포기되거나 유보될 수 없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세상에 알리는 우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들이 소리치기 전에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2009년 3월 10일 

                                                                 TOPIK 
                                                                 대한성공회 평화통일선교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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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Nine Articles of Religion (39개 신조) 

1. Of Faith in the Holy Trinity.

There is but one living and true God, everlasting, without body, parts, or passions; of infinite power, wisdom, and goodness; the Maker, and Preserver of all things both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unity of this Godhead there be three Persons, of one substance, power, and eternity;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제1조. 성 삼위일체 신앙에 관하여

한 분이시며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몸도 지체도 감정도 없으시며 무한한 능력과 지혜와 선을 가지시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창조자이시며 보호자이시다. 그리고 이 신성의 통일 속에서 하나의 본질과 능력, 영원성을 나누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니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2. Of the Word or Son of God, which was made very Man.

The Son, which is the Word of the Father, begotten from everlasting of the Father, the very and eternal God, and of one substance with the Father, took Man's nature in the womb of the blessed Virgin, of her substance: so that two whole and perfect Natures, that is to say, the Godhead and Manhood, were joined together in one Person, never to be divided, whereof is one Christ, very God, and very Man; who truly suffered,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to reconcile his Father to us, and to be a sacrifice, not only for original guilt, but also for actual sins of men. 

제2조. 참 인간이 된 말씀, 하느님의 아들에 관하여

성부의 말씀이신 성자는 영원하신 지극히 영원하신 성부로부터 나셨으며 성부와 함께 하나의 본질을 나누며 복되신 동정녀의 태에서 여인의 본질대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셨다. 그리하여 두 가지의 온전하고 완전한 본질들, 즉 신성과 인성은 한 위격 안에 함께 참여하며 결코 나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분이신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며 참 인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성부와 우리들의 화해를 위하여 실제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원죄뿐만 아니라 인간의 실제로 짓는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셨다.

 

3. Of the going down of Christ into Hell.

As Christ died for us, and was buried, so also is it to be believed, that he went down into Hell. 

제3조. 그리스도께서 음간에 내려가신 일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던 것처럼, 음간에 내려가셨음을 믿어야 한다.

 

4.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Christ did truly rise again from death, and took again his body, with flesh, bones, and all things appertaining to the perfection of Man's nature; wherewith he ascended into Heaven, and there sitteth, until he return to judge all Men at the last day. 

제4조.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진실로 부활하셨고, 살과 뼈, 그리고 완전한 사람의 본성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진 몸을 다시 취하셔서, 하늘에 올라 가셨으며, 마지막 날에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러 다시 오실 때까지 거기에 앉아 계신다.

 

5. Of the Holy Ghost.

The Holy Ghost,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is of one substance, majesty, and glory, with the Father and the Son, very and eternal God. 

제5조. 성령에 관하여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은 참되며 영원하신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함께 같은 본질과 권세, 영광을 가진다.

 

6. Of the Sufficiency of the Holy Scriptures for Salvation.

Holy Scripture containeth all things necessary to salvation: so that whatsoever is not read therein, nor may be proved thereby, is not to be required of any man, that it should be believed as an article of the Faith, or be thought requisite or necessary to salvation. In the name of the Holy Scripture we do understand those canonical Books of the Old and New Testament, of whose authority was never any doubt in the Church. 


Of the Names and Number of the Canonical Books.
 

Genesis

Exodus

Leviticus

Numbers

Deuteronomy

Joshua

Judges

Ruth

The First Book of Samuel

The Second Book of Samuel

The First Book of Kings

The Second Book of Kings

The First Book of Chronicles

The Second Book of Chronicles

The First Book of Esdras

The Second Book of Esdras

The Book of Esther

The Book of Job

The Psalms

The Proverbs

Ecclesiastes or Preacher

Cantica, or Songs of Solomon

Four Prophets the greater

Twelve Prophets the less.

And the other Books (as Hierome saith) the Church doth read for example of life and instruction of manners; but yet doth it not apply them to establish any doctrine; such are these following:

 

The Third Book of Esdras

The Fourth Book of Esdras

The Book of Tobias

The Book of Judith

The rest of the Book of Esther

The Book of Wisdom

Jesus the Son of Sirach

Baruch the Prophet

The Song of the Three Children

The Story of Susanna

Of Bel and the Dragon

The Prayer of Manasses

The First Book of Maccabees

The Second Book of Maccabees

All the Books of the New Testament, as they are commonly received, we do receive, and account them Canonical. 

제6조. 구원을 위한 성서의 충족성에 관하여

성서는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읽을 수 없고 성서를 통해서 증명될 수 없는 것들은 어떤 사람에게도 신앙의 신조나 구원에 필요한 사상으로 요구될 수 없다. 우리는 성서라는 이름을 가진 구약과 신약의 정경들의 권위가 교회 안에서 결코 의심받지 않았다고 이해한다.

 

정경들의 이름과 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판관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기상

역대기하

에즈라

느헤미야

에스델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대예언서 4권

소예언서 12권

다른 책들은 (제롬이 말했듯이) 교회에서 생활의 모범과 행동에 대한 가르침으로 읽을 수 있지만, 어떤 교리를 만드는데도 적용해서는 안된다. 그 책들은 다음과 같다.

에즈라 3서

에즈라 4서

에스델 잔서

지혜서

토비트

집회서(벤시라 예수)

유딧

바룩

세아이의 노래

마나쎄의 기도

수산나 이야기

마카베오상

마카베오하

벨과 벰

일반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모든 책들은 모두 정경으로 인정한다. 

 

7. Of the Old Testament.

The Old Testament is not contrary to the New: for both in the Old and New Testament everlasting life is offered to Mankind by Christ, who is the only Mediator between God and Man, being both God and Man. Wherefore they are not to be heard, which feign that the old Fathers did look only for transitory promises. Although the Law given from God by Moses, as touching Ceremonies and Rites, do not bind Christian men, nor the Civil precepts thereof ought of necessity to be received in any commonwealth; yet notwithstanding, no Christian man whatsoever is free from the obedience of the Commandments which are called Moral.

  제7조. 구약성서에 관하여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와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성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시며 하느님이요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므로 옛날의 족장들이 현세의 약속만을 구하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을 것이 못 된다. 모세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은 그와 관련된 예식과 의식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하지 않으며 그 정치적 규례도 모든 국가에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이른바 도덕적인 계명에 대한 순종에서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8. Of the Creeds.

The Three Creeds, Nicene Creed, Athanasius' Creed, and that which is commonly called the Apostles' Creed, ought thoroughly to be received and believed: for they may be proved by most certain warrants of Holy Scripture.

  제8조. 세 가지 신경에 관하여

니케아 신경과 아타나시우스 신경, 그리고 이른바 사도신경, 이 세 가지 신경은 철저하게 인정하고 믿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신경은 성서의 가장 확실한 보증으로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9. Of Original or Birth-Sin.

Original sin standeth not in the following of Adam, (as the Pelagians do vainly talk;) but it is the fault and corruption of the Nature of every man, that naturally is engendered of the offspring of Adam; whereby man is very far gone from original righteousness, and is of his own nature inclined to evil, so that the flesh lusteth always contrary to the Spirit; and therefore in every person born into this world, it deserveth God's wrath and damnation. And this infection of nature doth remain, yea in them that are regenerated; whereby the lust of the flesh, called in Greek, ,(which some do expound the wisdom, some sensuality, some the affection, some the desire, of the flesh), is not subject to the Law of God. And although there is no condemnation for them that believe and are baptized; yet the Apostle doth confess, that concupiscence and lust hath of itself the nature of sin. 

제9조. 원죄, 즉 생득의 죄에 관하여

원죄는 (펠라기우스파 사람들이 헛되이 말하듯이) 아담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인간의 본성에 있는 결함과 부패이다. 이것은 아담의 후손들에게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며, 이 때문에 인간은 원래의 의로움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본성상 악에 기우는 향이 있다. 그러므로 육은 항상 영에 거역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분노와 저주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본성의 오염은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도 남아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리스 어로 ‘프로네마 사르코스’라고 하는 육의 욕망(어떤 이는 이를 육의 지혜로, 혹은 색욕, 애착, 욕망으로 해석한다)은 하느님의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형벌이 없을 것이지만, 사도가 고백한 대로 색욕과 욕정은 그 자체로 죄의 본성이다.

 

10. Of Free-Will.

The condition of Man after the fall of Adam is such, that he cannot turn and prepare himself, by his own natural strength and good works, to faith; and calling upon God. Wherefore we have no power to do good works pleasant and acceptable to God, without the grace of God by Christ preventing us, that we may have a good will, and working with us, when we have that good will. 

제10조. 자유 의지에 관하여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인 힘과 선한 행위로써 신앙과 하느님을 찾는 일에 자신을 돌이키거나 준비할 수 없는 조건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기쁘고 받아들여질 만한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없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질 수 있고, 그 선한 의지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11. Of the Justification of Man.

We are accounted righteous before God, only for the merit of our Lord and Saviour Jesus Christ by Faith, and not for our own works or deservings. Wherefore, that we are justified by Faith only, is a most wholesome Doctrine, and very full of comfort, as more largely is expressed in the Homily of Justification.  

제11조. 인간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에 관하여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이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한 신앙으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업적과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신앙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에 관한 말씀에서 표현되듯이 가장 건전한 교리의 하나이며, 지극히 넘치는 위로가 된다.

   

12. Of Good Works.

Albeit that Good Works, which are the fruits of Faith, and follow after Justification, cannot put away our sins, and endure the severity of God's judgment; yet are they pleasing and acceptable to God in Christ, and do spring out necessarily of a true and lively Faith insomuch that by them a lively Faith may be as evidently known as a tree discerned by the fruit. 

제12조. 선행에 관하여

선행이 비록 신앙의 결실이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후에 따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죄를 없앨 수는 없으며, 하느님의 엄정한 심판을 견뎌낼 수는 없다. 그러나 선행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용납될 수 있으며,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에게서는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마치 나무가 열매를 통해 구별되듯이 선행으로 살아있는 신앙이 분명하게 알려지는 것이다. 

 

13. Of Works before Justification.

Works done before the grace of Christ, and the Inspiration of his Spirit, are not pleasant to God, forasmuch as they spring not of faith in Jesus Christ; neither do they make men meet to receive grace, or (as the School-authors say) deserve grace of congruity: yea rather, for that they are not done as God hath willed and commanded them to be done, we doubt not but they have the nature of sin. 

제13조. 의롭다고 인정받기 이전의 행위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의 행위들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이것으로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도 없으며,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듯이) 이에 적합한 은총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다. 오히려 이러한 행위는 하느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신 것에 따라 된 것이 아니며, 결국 우리는 이러한 행위가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14. Of Works of Supererogation.

Voluntary Works besides, over and above, God's Commandments, which they call Works of Supererogation, cannot be taught without arrogancy and impiety: for by them men do declare, that they do not only render unto God as much as they are bound to do, but that they do more for his sake, than of bounden duty is required: whereas Christ saith plainly When ye have done all that are commanded to you, say, We are unprofitable servants. 

제14조. 여분의 공덕에 관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자발적으로 행한 일을 여분의 공덕이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반드시 교만과 불경건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러한 행위를 가지고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요구되는 의무인데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계명대로 다 행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15. Of Christ alone without Sin.

Christ in the truth of our nature was made like unto us in all things, sin only except, from which he was clearly void, both in his flesh, and in his spirit. He came to be the Lamb without spot, who, by sacrifice of himself once made, should take away the sins of the world; and sin (as Saint John saith) was not in him. But all we the rest, although baptized and horn again in Christ, yet offend in many things; and if we say we have no sin, we deceive ourselves, and the truth is not in us. 

제15조. 그리스도만이 죄 없으심에 관하여

참된 인간의 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와 같지만, 그의 육신과 영혼은 죄에서만은 분명히 제외되셨다. 그는 흠이 없는 어린 양이 되어서 자기 자신을 단 한 번의 희생 제물로 삼아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죄가(요한이 말한 대로) 그분 안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 외에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지만 많은 일에서 죄를 짓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며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16. Of Sin after Baptism.

Not every deadly sin willingly committed after Baptism is sin against the Holy Ghost, and unpardonable. Wherefore the grant of repentance is not to be denied to such as fall into sin after Baptism. After we have received the Holy Ghost, we may depart from grace given, and fall into sin, and by the grace of God we may arise again, and amend our lives. And therefore they are to be condemned, which say, they can no more sin as long as they live here, or deny the place of forgiveness to such as truly repent. 

제16조. 세례 후에 지은 죄에 관하여

세례를 받은 후 자의로 지은 중대한 죄 모두가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아니며, 전혀 용서받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회개의 여지가 있다. 성령을 받은 후에 우리가 주어진 은총에서 이탈하여 죄를 짓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거나 참된 회개를 통한 용서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죄 받을 것이다.

 

 

17. Of Predestination and Election.

Predestination to Life is the everlasting purpose of God, whereby (before the foundations of the world were laid) he hath constantly decreed by his counsel secret to us, to deliver from curse and damnation those whom he hath chosen in Christ out of mankind, and to bring them by Christ to everlasting salvation, as vessels made to honour. Wherefore, they which be endued with so excellent a benefit of God, be called according to God's purpose by his Spirit working in due season: they through Grace obey the calling: they be justified freely: they be made sons of God by adoption: they be made like the image of his only-begotten Son Jesus Christ: they walk religiously in good works, and at length, by God's mercy, they attain to everlasting felicity. 

As the godly consideration of Predestination, and our Election in Christ, is full of sweet, pleasant, and unspeakable comfort to godly persons, and such as feel in themselves the working of the Spirit of Christ, mortifying the works of the flesh, and their earthly members, and drawing up their mind to high and heavenly things, as well because it doth greatly establish and confirm their faith of eternal Salvation to be enjoyed through Christ as because it doth fervently kindle their love towards God: So, for curious and carnal persons, lacking the Spirit of Christ, to have continually before their eyes the sentence of God's Predestination, is a most dangerous downfall, whereby the Devil doth thrust them either into desperation, or into wretchlessness of most unclean living, no less perilous than desperation. 

Furthermore, we must receive God's promises in such wise, as they be generally set forth to us in Holy Scripture: and, in our doings, that Will of God is to be followed, which we have expressly declared unto us in the Word of God. 

제17조. 예정과 선택에 관하여 생명에 관한 예정은 하느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이 안에서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전부터) 하느님은 우리에게 숨겨진 계획에 따라 인류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저주와 형벌로부터 구원하시고, 고귀하게 만들어진 그릇인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가져다주신다고 지속적으로 선포하신다. 하느님의 각별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목적에 따라 때가 차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은총을 통하여 부르심에 순종하며, 거저 의롭다고 여김을 받으며, 하느님께서 자녀로 받아 주신다. 이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이 되며, 경건하게 착한 일을 하며 살다가 마침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 

믿음을 가지고 예정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택을 생각하는 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참으로 달고 기쁘며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은 육체의 활동과 지상의 것들을 죽이고 그들의 마음을 높은 하늘로 들어 올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예정과 선택에 대한 생각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될 영원한 구원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며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에 강렬하게 불붙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의심 많고 현세적인 사람들의 시각으로 하느님의 예정에 대한 선언을 계속해서 따르는 것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악마는 이런 사람들을 절망으로 떨어뜨리거나 절망과 다를 바 없는 가장 더러운 삶의 비참함으로 빠뜨린다. 나아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 있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선포된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행동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18. Of obtaining eternal Salvation only by the Name of Christ.

They also are to be had accursed that presume to say, That every man shall be saved by the Law or Sect which he professeth, so that he be diligent to frame his life according to that Law, and the light of Nature. For Holy Scripture doth set out unto us only the Name of Jesus Christ, whereby men must be saved. 

제18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만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에 관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이 고백한 계명이나 종파에 따라 구원을 받으며 이에 따라 그러한 계명과 자연적인 빛에 따라 자기 생활을 맞추는데 부지런하면 된다고 말을 믿는 사람은 정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19. Of the Church.

The visible Church of Christ is a congregation of faithful men, in which the pure Word of God is preached, and the Sacraments be duly ministered according to Christ's ordinance, in all those things that of necessity are requisite to the same.

As the Church of Jerusalem, Alexandria, and Antioch, have erred, so also the Church of Rome hath erred, not only in their living and manner of Ceremonies, but also in matters of Faith. 

제19조.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가시적(可視的) 교회는 신실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순수한 말씀이 선포되며 성사들은 이에 필요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성사가 올바르게 집행된다.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가 오류를 범했듯이 로마 교회도 행위와 예배 의식의 방법에서 만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에서도 오류를 범하였다.

 

 

20. Of the Authority of the Church.

The Church hath power to decree Rites or Ceremonies, and authority in Controversies of Faith: and yet it is not lawful for the Church to ordain any thing that is contrary to God's Word written, neither may it so expound one place of Scripture, that it be repugnant to another. Wherefore, although the Church be a witness and a keeper of Holy Writ, yet, as it ought not to decree any thing against the same, so besides the same ought it not to enforce any thing to be believed for necessity of Salvation. 

제20조. 교회의 권위에 관하여

교회는 예배의식을 결정할 힘과 신앙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에 모순된 어떤 명령을 내리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고, 성서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모순되게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비록 거룩한 말씀의 증인이며 보존자이지만 성서에 반하는 어떤 법령도 포고해서는 안 되며, 성서 밖의 것을 가지고 구원에 필요한 것이라고 강제로 믿게 해서도 안 된다.

 

 

21. Of the Authority of General Councils.

General Councils may not be gathered together without the commandment and will of Princes. And when they be gathered together, (forasmuch as they be an assembly of men, whereof all be not governed with the Spirit and Word of God), they may err, and sometimes have erred, even in things pertaining unto God. Wherefore things ordained by them as necessary to salvation have neither strength nor authority, unless it may be declared that they be taken out of holy Scripture. 

제21조. 총회의 권위에 관하여

총회는 제후의 명령이나 의지 없이는 소집될 수 없다. 소집된 총회(이 모임은 성령과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다스리는 것은 아닌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하느님에 관한 일에 있어서도 때로 오류를 범한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총회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제정한 것이 성서에서 근거한 것으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힘도 없고 권위도 없다.

 

 

22. Of Purgatory.

The Romish Doctrine concerning Purgatory, Pardons, Worshipping and Adoration, as well of Images as of Relics, and also Invocation of Saints, is a fond thing, vainly invented, and grounded upon no warranty of Scripture, but rather repugnant to the Word of God. 

제22조. 연옥에 관하여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23. Of Ministering in the Congregation.

It is not lawful for any man to take upon him the office of public preaching, or ministering the Sacraments in the Congregation, before he be lawfully called, and sent to execute the same. And those we ought to judge lawfully called and sent, which be chosen and called to this work by men who have public authority given unto them in the Congregation, to call and send Ministers into the Lord's vineyard. 

제23조. 교회의 사목에 관하여

누구든지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아 회중 안에서 공적인 설교나 성사를 집전하도록 파송받기 전에 이러한 직책을 수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합법적으로 부름을 받고 파송 받은 사람이, 회중 안에서 주님의 포도원으로 사목자들을 부르고 파송할 수 있는 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에 의해서 이 일을 위하여 선택받고 부름 받았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24. Of Speaking in the Congregation in such a Tongue as the people understandeth.

It is a thing plainly repugnant to the Word of God, and the custom of the Primitive Church to have public Prayer in the Church, or to minister the Sacraments, in a tongue not understanded of the people. 

제24조. 회중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의 사용에 관하여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교회 안에서 공적인 기도를 드리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과 초대 교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다.

 

 

25. Of the Sacraments.

Sacraments ordained of Christ be not only badges or tokens of Christian men's profession, but rather they be certain sure witnesses, and effectual signs of grace, and God's good will towards us, by the which he doth work invisibly in us, and doth not only quicken, but also strengthen and confirm our Faith in him. 

There are two Sacraments ordained of Christ our Lord in the Gospel, that is to say, Baptism, and the Supper of the Lord. 

Those five commonly called Sacraments, that is to say, Confirmation, Penance, Orders, Matrimony, and Extreme Unction, are not to be counted for Sacraments of the Gospel, being such as have grown partly of the corrupt following of the Apostles, partly are states of life allowed in the Scriptures, but yet have not like nature of Sacraments with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for that they have not any visible sign or ceremony ordained of God. 

The Sacraments were not ordained of Christ to be gazed upon, or to be carried about, but that we should duly use them. And in such only as worthily receive the same, they have a wholesome effect or operation: but they that receive them unworthily, purchase to themselves damnation, as Saint Paul saith. 

제25조. 성사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에 대한 징표요 표시일 뿐만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은총과 선하신 뜻에 대한 효과적인 표시이다. 이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게 활동하시며,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신앙에 활력을 주고 굳세게 하며 견고하게 한다. 복음서에서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두 가지인데, 세례와 주님의 만찬이 그것이다. 소위 다섯 가지 성사라고 말하는 견진, 고해, 신품, 혼배, 조병성사는 복음서에서 말하는 성사에 포함되지 않으며, 부분적으로 사도들을 잘못 모방한데서 나타났으며, 부분적으로 성서에서 허용하고 있는 관습에 대한 언급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세례와 주님의 만찬과 같은 성사의 본질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가시적 표시나 의식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는 조배하거나 들고 다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가 말한 대로 성사는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유익한 효과와 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며, 이를 무가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스스로 벌을 초래하는 것이다.

   

26. Of the Unworthiness of the Ministers, which hinders not the effect of the Sacraments.

Although in the visible Church the evil be ever mingled with the good, and sometimes the evil have chief authority in the Ministration of the Word and Sacraments, yet forasmuch as they do not the same in their own name, but in Christ's, and do minister by his commission and authority, we may use their Ministry, both in hearing the Word of God, and in receiving the Sacraments. Neither is the effect of Christ's ordinance taken away by their wickedness, nor the grace of God's gifts diminished from such as by faith, and rightly, do receive the Sacraments ministered unto them; which be effectual, because of Christ's institution and promise, although they be ministered by evil men.

  Nevertheless, it appertaineth to the discipline of the Church, that inquiry be made of evil Ministers, and that they be accused by those that have knowledge of their offences; and finally, being found guilty, by just judgment be deposed. 

제26조. 성직자의 품성 결함이 성사의 효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가시적인 교회 안에서 악한 사람과 성한 사람이 섞여 있고, 때로는 악한 사람이 말씀과 성찬을 집전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위임과 권위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의 집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것의 효과가 이들의 사악함 때문에 소멸되는 것은 아니며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도 사람들에게 베풀어진 이 성사를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악한 사람이 집전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유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사목자를 심문하여 그의 잘못을 아는 사람들의 고발에 따라 결국 유죄가 입증된다면, 면직시키는 것이 교회의 치리에 합당하다.

   

27. Of Baptism.

Baptism is not only a sign of profession, and mark of difference, whereby Christian men are discerned from others that be not christened, but it is also a sign of Regeneration or New-Birth, whereby, as by an instrument, they that receive Baptism rightly are grafted into the Church; the promises of the forgiveness of sin, and of our adoption to be the sons of God by the Holy Ghost, are visibly signed and sealed, Faith is confirmed, and Grace increased by virtue of prayer unto God. 

The Baptism of young Children is in any wise to be retained in the Church, as most agreeable with the institution of Christ. 

제27조. 세례에 대하여

세례는 신앙고백의 징표이며,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는 표시일 뿐만 아니라 거듭남과 새로운 탄생의 징표이다. 이 징표를 도구로 하여 세례를 올바르게 받은 사람은 교회에 결합되며, 죄의 용서와 성령에 의하여 우리가 자녀로 받아들여진다는 약속이 가시적으로 가시적(可視的)으로 드러나며 보증을 받는다. 그리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를 통하여 신앙은 굳어지며 은총이 더해진다. 유아 세례는 그리스도의 제정하신 것에 가장 잘 조화되는 것으로서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 

 

28. Of the Lord's Supper.

The Supper of the Lord is not only a sign of the love that Christians ought to have among themselves one to another, but rather it is a Sacrament of our Redemption by Christ's death: insomuch that to such as rightly, worthily, and with faith, receive the same, the Bread which we break is a partaking of the Body of Christ; and likewise the Cup of Blessing is a partaking of the Blood of Christ. 

Transubstantiation (or the change of the substance of Bread and Wine) in the Supper of the Lord, cannot be proved by Holy Writ; but is repugnant to the plain words of Scripture, overthroweth the nature of a Sacrament, and hath given occasion to many superstitions. 

The Body of Christ is given, taken, and eaten, in the Supper, only after an heavenly and spiritual manner. And the mean whereby the Body of Christ is received and eaten in the Supper, is Faith. 

The Sacrament of the Lord's Supper was not by Christ's ordinance reserved, carried about, lifted up, or worshipped. 

제28조. 주님의 만찬에 대하여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과 함께 이루어야 할 사랑의 표시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성사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고, 합당하게, 또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떼는 빵을 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먹는 것이다. 주님의 만찬 안에서 화체(즉 빵과 포도주의 실체의 변화)가 된다는 주장은 성서에서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성서의 분명한 말씀에 위배되며 성사의 본질을 버리고 많은 미신의 여지를 주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 성찬에서 오직 천상적이고 영적인 방법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며 받아서 먹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먹는 길은 바로 신앙이다. 주님의 만찬의 성사, 즉 성체와 보혈은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르면 보존하거나 여기저기 들고 다니거나 들어 올리고 경배하는 대상이 아니다. 

 

29. Of the Wicked, which eat not the Body of Christ in the use of the Lord's Supper.

The Wicked, and such as be void of a lively faith, although they do carnally and visibly press with their teeth (as Saint Augustine saith)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yet in no wise are they partakers of Christ: but rather, to their condemnation, do eat and drink the sign or Sacrament of so great a thing. 

제29조. 불경한 사람이 주님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지 못하는 것에 관하여

불경건한 사람과 분명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육체적으로 가시적으로 입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성사를 댄다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나누어 먹은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이렇게 위대한 성사와 그 표지를 먹고 마시는 것이 그에게는 벌을 초래한다.

 

 

30. Of both Kinds.

The Cup of the Lord is not to be denied to the Lay-people: for both the parts of the Lord's Sacrament, by Christ's ordinance and commandment, ought to be ministered to all Christian men alike. 

제30조. 이종배찬(二種陪餐)에 관하여

주님의 잔을 평신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성사의 두 부분 모두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같이 배찬 되어야 함을 그리스도가 제정하시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31. Of the one Oblation of Christ finished upon the Cross.

The Offering of Christ once made is that perfect redemption, propitiation, and satisfaction, for all the sins of the whole world, both original and actual; and there is none other satisfaction for sin, but that alone. Wherefore the sacrifices of Masses, in the which it was commonly said, that the Priest did offer Christ for the quick and the dead, to have remission of pain or guilt, were blasphemous fables, and dangerous deceits. 

제31조. 십자가 위에서 끝난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물에 관하여

단 한번 이루어진 그리스도 자신의 봉헌은 원죄와 실범죄를 포함하여 세계의 모든 죄를 위하여 행하신 완전한 속죄이며, 화해이고 변상이다. 그리고 이 밖에는 죄를 보상할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른 바 미사를 희생 제의로 보고 사제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고통과 죄를 덜기 위해 그리스도를 봉헌했던 것은 불경하게 지어낸 이야기이며 위험한 기만이었다.

 

 

32. Of the Marriage of Priests.

Bishops, Priests, and Deacons, are not commanded by God's Law, either to vow the estate of single life, or to abstain from marriage: therefore it is lawful for them, as for all other Christian men, to marry at their own discretion, as they shall judge the same to serve better to godliness. 

제32조. 사제의 결혼에 관하여

하느님의 법은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독신 생활을 해야 한다거나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았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결혼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더 낫다고 판단한다면 결혼 또한 정당한 것이다.

 

 

33. Of excommunicate Persons, how they are to be avoided.

That person which by open denunciation of the Church is rightly cut off from the unity of the Church, and excommunicated, ought to be taken of the whole multitude of the faithful, as an Heathen and Publican, until he be openly reconciled by penance, and received into the Church by a Judge that hath authority thereunto. 

제33조. 파문된 사람을 피하는 것에 관하여

교회의 공개적인 선언에 따라 교회 공동체에서 정당하게 제외되고 파문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회개를 통하여 공개적으로 화해하여 교회의 권위에 따라 교회로 받아들여지기 까지는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이방인과 세리 취급을 받아야 한다.

 

 

34. Of the Traditions of the Church.

It is not necessary that Traditions and Ceremonies be in all places one, or utterly like; for at all times they have been divers, and may be changed according to the diversity of countries, times, and men's manners, so that nothing be ordained against God's Word. Whosoever, through his private judgment, willingly and purposely, doth openly break the Traditions and Ceremonies of the Church, which be not repugnant to the Word of God, and be ordained and approved by common authority, ought to be rebuked openly, (that others may fear to do the like,) as he that offendeth against the common order of the Church, and hurteth the authority of the Magistrate, and woundeth the consciences of the weak brethren.

  Every particular or national Church hath authority to ordain, change, and abolish, Ceremonies or Rites of the Church ordained only by man's authority, so that all things be done to edifying. 

제34조. 교회의 전통에 관하여

전통과 예배 의식은 반드시 어디에서나 한가지이거나 똑같을 필요가 없다. 모든 시대에 걸쳐 전통과 예배 의식은 다양했기 때문이며, 나라와 시대와 사람들의 관습의 다양성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어 제정할 수는 없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적인 판단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일이 없는 교회의 전통과 예배의식을 공공연히 파괴하는 행위, 즉 교회의 공적인 질서에 반대하고 교회 재판소의 권위를 해치며 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공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일을 두려워할 것이다). 

 

35. Of the Homilies.

The Second Book of Homilies, the several titles whereof we have joined under this Article, doth contain a godly and wholesome Doctrine, and necessary for these times, as doth the former Book of Homilies, which were set forth in the time of Edward the Sixth; and therefore we judge them to be read in Churches by the Ministers, diligently and distinctly, that they may be understanded of the people. 

Of the Names of the Homilies.  

Of the right Use of the Church.

Against Peril of Idolatry.

Of repairing and keeping clean of Churches.

Of good Works, first of Fasting.

Against Gluttony and Drunkenness.

Against Excess of Apparel.

Of Prayer.

Of the Place and Time of Prayer.

That Common Prayers and Sacraments ought to be ministered in a known tongue.

Of the reverent Estimation of God's Word.

Of Alms-doing.

Of the Nativity of Christ.

Of the Passion of Christ.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Of the worthy receiving of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Of the Gifts of the Holy Ghost.

For the Rogation-days.

Of the State of Matrimony.

Of Repentance.

Against Idleness.

Against Rebellion.

 

제35조. 교리서에 관하여

제2교리서는 그 내용의 제목을 이 조항에 부기하여 두거니와, 에드워드 6세 때 발행된 제1교리서와 같이 하느님께 합당한 전체적인 교리를 담고 있으며, 이 시대에 필요한 것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사목자들이 이를 충실하고 명확하게 읽어 주어 신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교리서의 내용

1. 교회의 올바른 이용에 대하여

2. 우상의 위험에 반대하여

3. 교회의 수리와 청결 유지에 대하여

4. 선행, 특별히 단식에 대하여

5. 과식과 과음에 반대하여

6. 지나친 치장에 반대하여

7. 기도에 대하여

8. 기도의 장소와 시간에 대하여

9. 반드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사용한 공동 기도와 성사에 대하여

10.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에 대하여

11. 구제 활동에 대하여

12.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13.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하여

14.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15.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를 올바르게 받는 것에 대하여

16.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17. 기원절(공도재)에 대하여

18. 결혼생활의 상태에 대하여

19. 회개에 대하여

20. 태만에 반대하여

21. 반란에 반대하여

 

36. Of Consecration of Bishops and Ministers.

The Book of Consecration of Archbishops and Bishops, and Ordering of Priests and Deacons, lately set forth in the time of Edward the Sixth, and confirmed at the same time by authority of Parliament, doth contain all things necessary to such Consecration and Ordering: neither hath it any thing, that of itself is superstitious and ungodly. And therefore whosoever are consecrated or ordered according to the Rites of that Book, since the second year of the forenamed King Edward unto this time, or hereafter shall be consecrated or ordered according to the same Rites; we decree all such to be rightly, orderly, and lawfully consecrated and ordered. 

제36조. 주교와 성직 서품에 관하여

에드워드 6세 때에 발행되어 의회의 승인을 받은 대주교와 주교의 축성 및 사제와 부제의 서품식 예식문은 축성과 서품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이 예식 문에는 미신적이거나 불경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성직자는 앞에서 말한 에드워드 왕 제2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도서의 의식에 따라 축성되고 서품되었으며, 이후에도 이와 같은 의식에 따라 축성되고 서품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축성되고 서품을 받은 모든 성직자를 올바른 질시에 따라 정당하게 축성 받고 서품 받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37. Of the Power of the Civil Magistrates.

The King's Majesty hath the chief power in this Realm of England, and other his Dominions, unto whom the chief Government of all Estates of this Realm, whether they be Ecclesiastical or Civil, in all causes doth appertain, and is not, nor ought to be, subject to any foreign Jurisdiction. 

Where we attribute to the King's Majesty the chief government, by which Titles we understand the minds of some slanderous folks to be offended; we give not our Princes the ministering either of God's Word, or of the Sacraments, the which thing the Injunctions also lately set forth by Elizabeth our Queen do most plainly testify; but that only prerogative, which we see to have been given always to all godly Princes in holy Scriptures by God himself; that is, that they should rule all estates and degrees committed to their charge by God, whether they be Ecclesiastical or Temporal, and restrain with the civil sword the stubborn and evil-doers. 

The Bishop of Rome hath no jurisdiction in this Realm of England. 

The Laws of the Realm may punish Christian men with death, for heinous and grievous offences. 

It is lawful for Christian men, at the commandment of the Magistrate, to wear weapons, and serve in the wars. 

제37조. 시민 통치 권력에 관하여

왕은 영국의 영토와 그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지역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다. 이 영역에 속하는 재산에 대해서 최고 지배권은 교회와 시민 권력을 불문하고 외국의 치리에 종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왕권에 최고의 통치권을 부여한 이상, 이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는 이들의 생각은 과오를 범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우리는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를 집전을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에 관하여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발표한 최근의 칙령이 가장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된 경건한 모든 왕들에 대하여 하느님 자신이 늘 부여하신 독자적인 특권이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책임을 주어 맡긴 모든 재산과 계급을 교회의 것이든 아니든 통치하며, 또 다스릴 때에 국가의 권력을 가지고 완고하고 악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을 말한다. 

로마의 주교는 영국 영토 안에서 어떤 치리권도 갖지 못한다. 영국 영역을 지배하는 모든 법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악하고 중대한 범죄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통치자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들고 전쟁에 나가는 것은 정당하다. 

 

38. Of Christian Men's Goods, which are not common.

The Riches and Goods of Christians are not common, as touching the right, title, and possession of the same; as certain Anabaptists do falsely boast. Notwithstanding, every man ought, of such things as he possesseth, liberally to give alms to the poor, according to his ability. 

제38조. 그리스도인의 재산은 공유물이 아님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부와 재산은 그 권리와 명칭과 소유에서, 재세례파 사람들이 거짓되고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공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 소유물을 가지고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주어야 한다. 

 

39. Of a Christian Man's Oath.

As we confess that vain and rash swearing is forbidden Christian men by our Lord Jesus Christ, and James his Apostle, so we judge, that Christian Religion doth not prohibit, but that a man may swear when the Magistrate requireth, in a cause of faith and charity, so it be done according to the Prophet's teaching in justice, judgement, and truth. 

제39조. 그리스도인의 맹세에 관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야고보께서 우리의 공허하고 경박한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사랑을 위하여 통치자가 맹세를 요구할 때는 맹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언자들의 교훈에 따라서 정의와 올바른 판단과 진리로 맹세해야 한다.

(한글번역자: 한국성공회 주낙현 신부 )


Posted by 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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