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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악령의 호소

by 분당교회 2016. 6. 17.

악령의 호소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게르게사 지방에 다다랐을 때 예수와 마주친 악령이 소리 질렀습니다.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악령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존재가 바로 예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존재, 그리고 예수의 권위로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한 마디가 악령으로서는 괴롭고 참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성서의 기록을 보면 악령은 스스로 독립해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항상 어떤 사람 속에, 급기야는 돼지 속에 들어가서 기생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 악이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겠지요. 항상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번식합니다. 그 수효가 엄청 많아서 ‘군대’라고 했습니다.


악령 들린 사람은 무덤을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죽음 곁에서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감사보다는 죽음의 어두움이 더 친근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는 ‘죽음에의 본능’(necrophilia)과 ‘생명에의 본능’(biophilia)가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의 본능은 죽은 것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성격적으로 ‘모든 죽어 있는 것, 부패된 것, 썩은 냄새를 피우는 것, 병든 것에 열광적으로 끌리는 성향’을 말합니다. 생명체를 생명이 없는 그 무엇인가로 해체시키려는 열정이며,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는, 그래서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를 무기체로 만들고야 마는 열정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히틀러나 스탈린이 그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적을 죽임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도 문제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여러 무고한 사람마저도 죽입니다. 파괴를 위한 파괴, 죽음을 위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나운 맹수라도 자신의 종족 번식을 위한 먹이 사냥을 넘어서는 살생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즐기는 단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생명의 본능’은 인간이건 생물이건 그 성장을 촉진하는 열정입니다. 낡은 것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에너지입니다. 사람을 물건처럼 또는 자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안에 담겨있는 존엄성을 봅니다.


악령 들린 사람은 옷도 걸치지 않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수치심도 없고 난폭합니다. 사람들이 말릴 수가 없어서 쇠사슬로 묶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떨어져있습니다. 늘 외롭고 우울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습니다. 


소위 ‘묻지 마’ 살인 사건들의 범인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이런 경향의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타 종교인, 성적 소수자, 여성, 이방인 등 약자들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더해진 경우 무차별 테러와 총격이 가해집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죽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고 양산되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범인의 심리적인 진단이 등장하곤 하는데 결코 그 개인의 문제로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쩌면 물질 만능의 사회, 빈부의 격차가 극심한 사회, 인간다운 교류가 꽉 막힌 사회가 악령의 숙주가 되어 그 수효를 양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가 나가자 그 사람은 옷을 멀쩡히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 앞에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귀가 문제였던 것이지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악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정죄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마귀의 항변에만 대응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멀쩡한 사람으로 회복되자 예수께서는 그를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공동체 속으로 다시 이웃과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모두가 그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의 전력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미쳤던 사람이다. 그러니 경계해야 한다.’ 이렇게 그 사람을 대한다면 다시 악령을 찾아 무덤가로 가게 될 것입니다.


정말 악하다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될 때도 ‘내가 그의 옆에 있는 이유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를 나눠 주기 위해서일 뿐이다’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사람을 그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안에 있는 악령을 추방하셨습니다. 이것은 악령과의 싸움입니다. 


악령과의 싸움의 기본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상처와 증오와 혐오를 퇴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가능성과 생명력과 사랑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 에너지의 산실입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6월 12일 연중 11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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