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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참회의 축복

by 분당교회 2016. 6. 13.

참회의 축복


진리를 탐구하고 깨닫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진실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진리라는 것도 진실함에 답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진실한 사람의 말과 행동은 맑고 아름다운 하늘처럼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하느님 앞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를 훈련하고 하느님께 내 자신을 내어 맡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식사 중에 한 여인이 다가와 눈물로 발을 적십니다.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고 나서 향유를 적십니다. 얼마나 눈물을 많이 흘리면 발을 적실 수 있을까요?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리기 위해 얼마나 깊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할까요? 악어의 눈물이라는 위선적인 눈물도 있지만 이 여인의 눈물은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눈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피에르 쉬볼리라스 작, 시몬의 집에서의 식사)


이 여인은 죄 많은 여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혼자서 인생의 큰 짐을 짊어지고 온갖 멸시와 천대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의 눈물은 인생의 짐의 크기만큼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던 인생이었으니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깊었을 것이고, 자신을 내어 맡기고 속에 고인 앙금을 풀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이 안고 있던 모든 상처와 부끄러움과 고달픔을 다 받아 주실 분으로 믿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그런 분을 가까이서 믿고 의지하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은 예수님을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부끄러운 죄와 과거를 쏟아 놓아도 안심할 수 있는 구세주로 확신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다가서는 것을 꺼려했고, 더욱이 접촉하는 것은 경멸할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따스한 가슴의 소유자임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두려움과 망설임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갔습니다. “진심으로 용서를 빕니다. 나도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하는 마음을 눈물로서 예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눈물은 죄의 찌꺼기로 더럽혀진 자신의 과거와 가슴을 깨끗이 씻는 정화수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 번쯤이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삶의 전환을 맞이할까요? 하느님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맑은 눈물을 쏟으며 하느님의 용서를 구한 적이 언제일까요? 혹시 나는 누구를 용서해줘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든지, 누구누구는 용서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며 살지는 않을까요?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서 투명한 가슴을 드러내 보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 진실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죄가 깊을수록 받는 은혜도 깊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빚에 대한 탕감으로 비유했습니다.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적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보다 훨씬 더 감사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를 체험해 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고, 세상을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곳으로 알고 하느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는 법입니다.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진실한 기도를 멀리하고 마니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회하고 하느님 앞에 진실한 모습으로 섰을 때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 중에 한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쓴 ‘고백록’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해 하느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고백록에 단순히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채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고백이란 참회와 더불어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은 의사에게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찬양은 치유에 대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용서받은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은 여인의 발걸음은 어땠을까요?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방안에 들어섰던 그 발걸음은 용서를 통한 기쁨의 발걸음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심판은 죄 때문에 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주십니다. 그 회개의 때, 만남의 때, 구원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6월 12일 연중 11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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