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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백인대장의 고백

by 분당교회 2016. 5. 30.

백인대장의 고백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낫겠나이다.’ 영성체 직전에 하는 이 고백은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 듣기만 한 이방인의 고백입니다. 열심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 신자도 유다인도 아니지만 이 사람의 고백은 모든 신앙인의 가슴에 남아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린 로마 장교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직책이겠지만 부하들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인대장의 종이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유다인의 원로들로 하여금 예수께 종을 살려주게끔 간청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 근처까지 갔습니다. 백인대장은 전갈을 보내 ‘수고롭게 오실 것까지 없습니다. 저는 감히 나가 뵐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감탄을 하셨고 그 중병이 걸린 종은 깨끗이 나았습니다.


이 사건 속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신앙인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어떤 고백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께서 백인 대장의 종을 치료하시다, 파울로 베로네세 작품)


백인대장은 가슴이 따듯한 사람입니다. 그는 종 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그대로 방치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로마 시대의 종이란 물건처럼 사고팔고 하는 하찮은 존재라 병들어 죽어도 그만이고 다른 종으로 대체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 종이 죽어가는 것이 못내 안쓰럽고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습니다. 우리 노동현장에서 병들거나 사고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의 결말이 어떤지, 또 일의 능률과 생산성에 따라서 인간의 값어치를 매기는 현실을 생각해 보면 백인대장은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사용자로서 자기의 법적인 책임만 면하면 되지 이를 넘어서 어떤 인격적인 관계와 도덕성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백인대장의 따듯한 가슴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백인대장은 가슴이 넓은 사람입니다. 유다인의 원로들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서 예수께 갑니다. 그리고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남의 일에 이렇게 간곡한 부탁을 하게 되기 까지는 백인대장이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그는 유다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회당까지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민족의 벽과 종교의 벽을 넘어서 존중과 배려의 마음을 베푼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철저한 경계의 선을 긋고 살았습니다. 함께 식사하는 것을 죄짓는 것으로 여겼을 정도였습니다. 원로들이라 했으니 더욱 그 벽은 높고도 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 나서서 ‘그 백인대장은 도와주실 만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을 때는 이미 그 경계의 벽을 넘어서 인간적인 신뢰와 존중이 쌓여져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과연 내가 곤경에 처해있을 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성의를 가지고 ‘간곡히’ 남에게 부탁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깊은 반성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교회에서 중보기도를 통해 이웃과 교우들의 간절한 소망을 대신 하느님께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생각하게도 됩니다.


백인대장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스스로 예수님을 집으로 모실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했습니다.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집이 누추하거나 옹색해서 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은 하찮은 사람에 불과하므로 예수님 같은 분을 모실만한 인간적인 자격이 안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수고롭게 오실 것 없이 그저 한 말씀이면 족하다고 한 것입니다. 쥐꼬리 만 한 권세만 가져도 행세하기 바쁜 사람들이 즐비한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의 겸손한 인격에서 풍겨져 나오는 진실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한 말씀만 하시라’는 고백은 단순히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따듯한 가슴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스스로 낮추는 인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차별’ 그리고 ‘혐오’가 한국사회의 그림자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에 대해 퍼붓는 차별의 말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남성이 여자들이 자기를 업신여긴다고 해서 무고한 여성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죽은 여성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다시 혐오와 비아냥의 퍼포먼스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도덕성과 양심을 담은 인간의 가슴이 사라져버리는 듯 합니다. 백인대장의 가슴이 그립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5월 29일 연중 9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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