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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낫기를 원하는가?

by 분당교회 2016. 5. 2.

낫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지만 영적인 기쁨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행위만 남을 때,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앞 설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만과 짜증, 권태가 느껴질 때, 기도와 말씀을 통한 마음의 평화보다는 속된 쾌락이 우선될 때 우리는 영적인 침체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마비 또는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이 없다고 여겨지고 자신의 영적생활에 무관심해지고 더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거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몸도 교회에 있지만 침체 상태에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신앙인의 영적 침체는 갑작스럽게 오기보다는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병은 속에서 은밀하게 자라기 때문에 쉽게 자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영적인 침체의 바이러스는 공동체에도 번식이 되어서 공동체 전체를 침체상태로 빠뜨리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동체가 세속화되고 영적 교제보다는 인간적인 친분관계로 분파가 생겨나기도 합니다. 겸손과 배려와 친절보다는 경쟁과 시기 질투가 지배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교회이지만 그리스도 없는 교회 모임이 되어 버립니다.


아버지의 집을 나간 탕자가 영적인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가리옷 사람 유다는 예수 곁에 있으면서도 영적인 죽음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보다는 돈과 이해득실이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의 발등에 기름을 부은 마리아를 이해 할 수 없었으며 예수를 판돈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윌리엄 호가스의 베데스다 연못의 그리스도(Christ at the Pool of Bethesda)


38년 동안 연못가에 누워있던 병자는 전형적으로 영적 침체 상태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연못에 천사가 이따금 내려와 물을 휘저을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낫는다고 해서 근처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보고 예수께서는 ‘낫기를 원하느냐?’하고 질문하십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 또 혼자서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병자가 병이 낫기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텐데 예수께서는 그런 질문을 하신 것도 이상하지만, 그 병자는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 것을 원망하고, 못에 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을 불평합니다. 이 사람은 앓고 있었던 병은 육신의 병이 아니라 체념이라는 병,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병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願)이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육신의 병보다 소망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신세타령과 남에 대한 불평불만만 늘어놓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질문은 그 병자가 낫기를 원하는지 궁금해서 물으셨다기 보다는 그 병자가 영적 침체 상태를 자각하기를 바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진짜 자신의 마음에 낫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의지가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현주소를 겸손하고 진지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본인은 부인하고 싶고 진단을 거절하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본인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의사의 객관적인 분석과 판단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상태를 하느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진단을 받고 그 처방도 받아야 합니다. 그 진단과 처방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개란 자기의 힘으로 영적 침체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환자가 낫기를 원해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진정한 불치병은 상사병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낫기를 바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회개가 일어날 때 우리는 안일과 침체의 요를 걷어들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거역할 수 없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게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소통이 안 된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출입구를 닫아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병아리가 알에서 우는 소리를 내면 어미가 밖에서 껍질을 깨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는 바로 이런 만남의 관계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나’가 탄생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5월 1일 부활 6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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