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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용신부169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계명이란 신적인 권위로 내려진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어떤 주장이나 학설처럼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계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명령이 본래의 정신과 목적과는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불순종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오히려 증오와 복수를 결과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소수의 악을 죽임으로서 다수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한다는 공리주의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생각이 우선되.. 2016. 4. 25.
망각의 무덤을 열라! ‘망각의 무덤을 열라!’ 예수께서 비통한 심정으로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냥 무덤 문을 열고 라자로를 일으키시면 될 것을 그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의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감입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에게서 기적만 바랄 뿐입니다.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이, 그리고 죽은 이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사람들과 한 입장이 되고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 2016. 4. 1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자들 몇몇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등하고 번민했던 것 같습니다.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아마도 무거운 침묵을 흘렀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라고 하시자 어부들은 그대로 하여 그물을 끌어 올릴 수 .. 2016. 4. 11.
예수님의 숨결 예수님의 숨결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어놓고 숨었다고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웠다고 했지만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의 동료라는 것만으로도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야 있지만 전체적인 정황이 그렇게 긴박한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그들은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인들이 제자들을 색출해서 탄압하려고 했다는 증언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리마태오 요셉이나 니고데모 등이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안식일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 2016. 4. 3.
가두어 둘 수 없는 것 가두어 둘 수 없는 것 부활의 최초의 증언자는 막달라 마리아이었습니다.예수를 지극히 사랑한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어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 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신실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합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간 줄로 알고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 달려 온 제자들이 무덤을 확인할 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예수는 더 이상 울지 말고 형제들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현장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간 .. 2016. 3. 28.
두 명의 행운아 두 명의 행운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길목에 두 사람의 행운아가 있습니다. 바라빠와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바라빠는 소요를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무력으로 유다의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입니다만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습에 따라 빌라도는 내심 죄를 찾아 볼 수 없는 예수를 석방할 요량이었으나 군중들은 바라빠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에는 다윗의 왕권을 다시 세워줄 영웅으로 기대했었지만 실제로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의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라빠는 뜻 밖에 엄청난 행운.. 2016. 3. 21.
거룩한 낭비- 경제로부터의 자유 거룩한 낭비- 경제로부터의 자유 어떤 실리나 보상 그리고 효율을 기대하지 않고 투자를 한다면 낭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급적 낭비를 줄이려고 합니다. 그 어떤 분야에 투자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는 공부를 해도 그 어떤 반대급부를 얻을 것을 기대합니다. 하다못해 선물을 줄 때도 상대방의 감사하는 마음이라도, 또는 상대방의 호감이라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길을 갈 때에도 가급적 적은 노력으로 짧은 길로 빠르게 가려는 효율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많은 행위가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다는 경제 원칙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합리적인 이유와 타당성이 없으면 행동의 동기가 없어지고 무의미한 일로, 시간과 재물과 정력의 낭비로 치부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본.. 2016. 3. 13.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 심리상담학자이며 천주교 신부인 헨리 나우엔은 장애인 공동체에 가기 직전에 화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접합니다. 러시아를 방문할 때 진본을 직접 볼 기회가 있어서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을 보며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 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일생 자체가 돌아온 탕자와 비슷한 인생이기도 하거니와 그림이 담고 있는 영성의 깊이에 매료된 것입니다. 복음의 축소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헨리 나우엔은 이 그림을 소재로 글을 썼는데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붉은 망토를 걸친 아버지의 표정과 눈빛은 인자함과 거룩함의 광채가 풍겨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2016. 3. 6.
회개의 열매 회개의 열매 작년 연말 뉴스에 종군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 불가역적 합의’라는 말이 나왔을 때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일 양국 정부가 종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된다고 하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 정부 책임자가 사과를 하고 100억 원을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사업에 제공한다는 것으로 마침내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타결을 했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고는 과연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 일생을 고통 속에 살아온 할머니들이 받아들일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합의로 말미암아 다시 정신대 할머니들의 피눈물 나는 증언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일본의 사과는 당연히 마음에도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이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드러.. 2016. 2. 28.
고난 속에 숨은 영광 고난 속에 숨은 영광 예수께서 제자 세 사람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그 모습이 변하여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천상에 존재한다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십니다. 깊이 잠들었던 베드로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며 초막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일종의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야말로 천상의 존재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저 예수께서 신비로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 2016. 2. 22.
네 번째 유혹 네 번째 유혹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을 두고서 여러 문인들이 글을 써 왔습니다. T. S 엘리엇은 시극 ‘대성당의 살인’에서 순교를 앞 둔 베케트 대주교에게 유혹자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악마에게 세 번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물질과 권세와 명예에 대한 유혹에 덧붙여서 엘리엇은 의도적으로 순교함으로서 성인이 되라고 말하는 네 번 째 유혹자를 등장시킵니다. 베케트 대주교는 이 유혹자야말로 가장 교활하고 견디기 힘든 유혹이라고 말하며 물리칩니다. ‘선한 결과를 예측한 불순한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에 ‘대신문관의 전설’이라는 대목 속에서 예수가 악마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서 인류를 더욱 풍요롭고 고통 없이 살게 할 수 있.. 2016. 2. 14.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베드로의 이 한 마디는 신앙인들의 순명이 어떠한 것인가를 가장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으로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어느 때 어디에서 쳐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깊은 밤에 호수 언저리에서 그물을 치는 것이 대대로 내려온 고기잡이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신 말씀은 기존의 관습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시도 또는 도전을 하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새.. 2016.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