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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고난 속에 숨은 영광

by 분당교회 2016. 2. 22.

고난 속에 숨은 영광


예수께서 제자 세 사람과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그 모습이 변하여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천상에 존재한다는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십니다. 깊이 잠들었던 베드로가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을 봅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며 초막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하늘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일종의 초월적인 신비체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예수야말로 천상의 존재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이야기를 그저 예수께서 신비로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 지니는 의미를 예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했던 내용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멀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 받고, 재판받고, 능멸을 당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 영광스러운 천상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느님을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수난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간의 탐욕과 낡은 종교적 계율과 싸우셨기 때문에 그 결과로 십자가에 달리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오반니 벨리니 작 / 예수, 모세, 엘리야)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중세의 신비주의 수도자는 ‘그리스도를 본 받아(준주성범)’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한테는 하늘에 있는 그분의 나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분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분에게는 위안을 바라는 사람은 많은데 고통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분의 잔치 자리에 참석하려는 사람은 많은데 그분과 함께 금식하려는 자는 적습니다. 모두가 그분과 함께 기뻐하기를 바랍니다만 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당하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되 떡을 뗄 때까지만 따르고 그분의 수난의 잔을 마시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숱한 사람이 그분의 기적을 숭배합니다만 십자가의 모욕을 당하기까지 그분을 따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생과 수고를 겪지 않는 한도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한테서 무슨 위로를 받는 한도 안에서 그분을 찬양하고 기립니다. 만일 예수님이 몸소 몸을 빼시어 그들을 떠나시면 그들은 원망하여 낙심합니다.’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모습의 예수님께 초막을 짓겠다고 한 말도 이렇게 십자가를 사랑하지 못한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웃을 섬기며 희생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이지 예수의 영광스러운 ‘복’을 매개로 교인을 늘리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정신과 실천이 없는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로 둔갑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인도의 간디도 나라를 망치는 7가지 사회악을 말하면서 ‘희생 없는 종교’를 들었습니다. 희생 없는 신앙과 종교는 오히려 이기심과 탐욕을 부추긴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십자가에는 영광스러운 부활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는 불굴의 신앙으로 진리와 사랑을 전하는 열정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시며 하늘의 별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자 아브라함은 순종할 것을 약속합니다. 지금 비록 나그네 된 몸이고 현실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겠지만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할 때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바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동안 모진 고생을 다 겪으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이지만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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