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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아버지의 집으로

by 분당교회 2016. 3. 6.

아버지의 집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 심리상담학자이며 천주교 신부인 헨리 나우엔은 장애인 공동체에 가기 직전에 화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을 접합니다. 러시아를 방문할 때 진본을 직접 볼 기회가 있어서 하루 종일 앉아서 그림을 보며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 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일생 자체가 돌아온 탕자와 비슷한 인생이기도 하거니와 그림이 담고 있는 영성의 깊이에 매료된 것입니다. 복음의 축소판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는 헨리 나우엔은 이 그림을 소재로 글을 썼는데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림에서 붉은 망토를 걸친 아버지의 표정과 눈빛은 인자함과 거룩함의 광채가 풍겨 나오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은 세상에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온 모습입니다. 아들의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고 신발은 다 헤지고 조각이 떨어져 나가 있으며 발은 흉터로 얼룩져 있어 그 동안의 고생을 고스란히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있고 아버지는 그 동안 애타게 기다렸던 아들을 따듯하게 안아주는 모습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몇몇 사람들은 무관심하기도 하고, 호기심을 보이기도 하고, 몽상에 빠지기도 하고, 세심하게 관찰하기도 합니다. 뒷전에 서 있는 이도 있고, 아치에 기댄 이도 있고, 팔걸이의자에 앉은 이도 있고 두 손을 모아 쥐고 선 이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푸노라’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맛볼 수 있는 감격적인 해후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램브란트, 돌아온 탕자)


하느님은 이 세상을 지으실 때 ‘보시니 참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마다 이 말씀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변화산상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사랑하는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느새 자기 자신의 몫을 찾게 됩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작은 아들의 태도는 마치 아버지가 어서 죽어주길 바라는 꼴입니다. 유산 분할 뿐만 아니라 처분할 권리까지 요구했습니다. 작은 아들의 요구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암시가 담겨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유권뿐만 아니라 처분권까지 받아내고서는 마구 사용합니다. 재물로 인해 영혼이 타락하는 경우가 동서고금을 통해 얼마나 많을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마구 훼손하고 후세대를 배려하지 않아 급속도로 기후변화가 생겨나는 현실은 탕자가 재산을 마구 사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을 겪고 치열한 경쟁사회에 몸을 담구면서부터 ‘사랑하는 아이야, 네게 은혜를 베풀어주마!’라는 하느님의 음성 대신에 다른 소리를 듣고 삽니다. 사람들은 ‘당장 나가서 당신이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 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당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고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노후 대책은 다 세워놓고 있는 거냐?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게 알려지는 순간, 관심을 거두는 게 세상인심이야.....’ 우리는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서 이런 가치관과 세계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나 사랑해? 정말 사랑하는 거지?’라고 묻고 그 대답을 들으려고 합니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들, 즉 건강, 지식, 재물, 성품, 정서 등등의 은사들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인정과 칭찬을 받으며, 보상을 얻어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멀어져 우리 자신을 탕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모든 것을 다 잃은 아들은 허리에 단도를 차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분을 표시하는 상징입니다. 아버지 가문의 아들이라는 표시입니다. 아들은 밑바닥 인생을 헤매면서도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관계만큼은 절대로 놓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만일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관계마저도 하찮게 여겼더라면 아마도 그 칼마저 팔아먹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되돌아오는 발걸음의 출발은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일꾼이 되고자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품꾼이 된다는 것은 완전한 관계회복이 아니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방책에 불과합니다. 이런 아들을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안아줍니다. 진정한 용서는 아버지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자신을 내어드릴 때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집착과 욕심 그리고 세속적 쾌락에 집중되어 소진되고 있는 우리의 인생의 행로를 더 멀리 가기 전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3월 6일 사순 4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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