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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누가 이웃인가?

by 분당교회 2016. 7. 11.

누가 이웃인가?


저 맑은 하늘에 빛나는 태양은 사람을 골라서 햇빛을 내리지 않습니다. 또한 비가 내릴 때도 사람을 가르지 않습니다. 비와 햇빛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큰 사람, 작은 사람, 어디 출신 따질 것 없이 똑같이 내리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꽃이 향기를 뿜어 줄 때 젊은이와 어르신, 고상한 사람과 비천한 사람, 남자와 여자, 짐승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랑이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지참금이나 혼수품을 뭘 들고 오는지에 관심을 쏟다보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고 물질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마음에 맞는 사람들 또는 익숙한 사람들만 사랑하고 낯선 사람들을 따돌린다면 보상을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이기심과 편향된 마음이 들어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꽃의 향기도 빛도 누가 다가오면 생겨났다가 없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알 필요도 까닭도 없습니다. 인위적이지도 않고 목적을 가지고 행한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언제 사랑을 베풀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른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어느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 답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물론이고 율법교사도 잘 알고 있는 정답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살 수 있다’고 하신 대답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인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라는 말씀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때에 따라서 사랑을 베풀고,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베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꽃의 향기가 누가 있든지 없든지 항상 뿜어져 나오듯이 그렇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Jose Tapiro Baro)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을 모릅니다. 또한 강도 만난 사람도 이름도 모릅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저 길에서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서로 사랑을 베풀어야 할 어떤 이유도 책임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서 반쯤 죽도록 상처를 입은 사람을 보살핍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줍니다.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잘 보살펴 주기를 당부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면서 갚아 주겠다는 약속까지 합니다. 응급처치 뿐만 아니라 애프터서비스까지 완결합니다. 사고를 만났거나 불행을 당한 이웃을 도울 때 이처럼 끝까지 완결을 하는 것은 드뭅니다. 보통은 잠깐 응급처치를 하거나 아니면 신고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손을 씻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당장의 위급함을 넘어서서 완전히 회복 될 때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이웃 대접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혼혈 되었다고 해서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성전을 재건축 할 때도 그들의 손길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혈통과 계급을 넘어서는 사랑을 베풉니다. 그는 이웃 대접을 받을 수 없었지만 불행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어떤 보상을 해 줄 것인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이틀 치 일당에 해당하는 돈을 여관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일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또 성전과 성물을 관리하고 십일조를 거두어들이는 일을 하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과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거룩한 일’일까요? 이웃이 누구인가를 질문하고 토론하는 것보다는 내가 과연 어떤 이웃이 되어 있는지를 묻고 반성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7월 10일 연중 15주일, 장기용 요한 신부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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