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436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측은지심 예수님의 기적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거나, 배고픈 사람들을 먹일 때 그리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거나 할 때 반드시 ‘측은한 마음’부터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감각한 마술사가 아니라 아파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누셨습니다. 공감 없는 기적은 단지 신기한 현상일 뿐이겠지만 슬픔과 아픔을 나누는 가운데 이루어진 기적은 사랑입니다. 흘러넘치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 데 장례행렬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과 따르는 무리 그리고 장례행렬의 만남은 마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행렬과 죽음과 절망의 행렬이 만나는 장면입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만남이 그러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죽은 사람은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습니다... 2016. 6. 7. 백인대장의 고백 백인대장의 고백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낫겠나이다.’ 영성체 직전에 하는 이 고백은 놀랍게도 예수님에 대해 다른 사람들한테 전해 듣기만 한 이방인의 고백입니다. 열심히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 신자도 유다인도 아니지만 이 사람의 고백은 모든 신앙인의 가슴에 남아 예수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중요한 순간에 우리의 입으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병사를 거느린 로마 장교입니다. 그리 높지 않은 직책이겠지만 부하들더러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게 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인대장의 종이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은 유다인의 원로들로 하여금 예수께 종을 살려주게끔 간청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 근처까지 갔습니.. 2016. 5. 30. 믿음을 넘어서 깨달음으로 믿음을 넘어서 깨달음으로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모든 종교에는 ‘표층’과 ‘심층’이 있다고 합니다. 표층 종교에 머무는 신앙인은 교회나 절을 다니는 것, 헌금 바치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 등을 통해서 내가 복을 받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땅에서 병들지 않고 재산도 많이 형성해서 남보란 듯이 살고 또 죽어서도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심층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은 같은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자신의 욕심을 줄여가고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공감하며 사랑을 베푸는 훈련에 관심이 있습니다. 종교 의례에 참석하면서도 하느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또한 표층 종교에 속하는 사람들은 초월적인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 2016. 5. 25. 성령을 담는 그룻 성령을 담는 그릇 겉으로 보기에는 늘 푸른 듯한 상록수도 때가 되면 잎갈이를 합니다. 사시사철 청정하게 보이는 대숲도 새 죽순이 올라올 무렵이면 겨울을 버티던 묵은 잎이 지고 그 자리에 새 잎이 돋아납니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 묵은 것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준엄한 법칙입니다. 묵은 잎이 떨어지고 새 잎이 돋아나는 변화가 없다면 늘 푸른 나무일 수가 없고, 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피어있는 것만이 꽃이 아니라 지는 것 또한 꽃입니다. 그래서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겠지만 질 때도 고와야 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위해서 그 자리를 내어 주어야 삽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 생명에게 낡은 생명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봄철이 무르.. 2016. 5. 16. ‘없이 계시는’ 예수님 ‘없이 계시는’ 예수님 성탄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면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낮은 곳으로 오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는 것을 ‘교만’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부활 승천은 땅이 하늘로 올라간 ‘초월’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땅만 쳐다보고 있다면 초월자이고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과 공간 속에 제한되어 있는 하느님만을 찾는다면 우상을 찾는 것이고 영원하신 궁극적 실재를 만나기를 거부하는 ‘태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이 승천의 사건을 우리는 예수께서 우주 공간 어디로 날아가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주개발 시대를 살.. 2016. 5. 13. 낫기를 원하는가? 낫기를 원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입니다.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여하지만 영적인 기쁨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행위만 남을 때, 일상생활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기보다는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앞 설 때, 감사하는 마음보다는 불만과 짜증, 권태가 느껴질 때, 기도와 말씀을 통한 마음의 평화보다는 속된 쾌락이 우선될 때 우리는 영적인 침체 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영적인 침체 또는 사망은 하느님과의 소통이 마비 또는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이 없다고 여겨지고 자신의 영적생활에 무관심해지고 더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을 등지거나 문을 닫아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자신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며 몸도 교회에 있지만.. 2016. 5.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계명이란 신적인 권위로 내려진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어떤 주장이나 학설처럼 이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계명을 신성하게 여기고 지켜야 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더욱 좋은 일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숙제가 남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절대적인 명령이 본래의 정신과 목적과는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불순종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오히려 증오와 복수를 결과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아마도 소수의 악을 죽임으로서 다수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한다는 공리주의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인간의 생각이 우선되.. 2016. 4. 25. 망각의 무덤을 열라! ‘망각의 무덤을 열라!’ 예수께서 비통한 심정으로 한 무덤 앞에 섰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부활하시는 신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 그냥 무덤 문을 열고 라자로를 일으키시면 될 것을 그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서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의 뿌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며 공감입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아무런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단지 예수에게서 기적만 바랄 뿐입니다. 단지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이, 그리고 죽은 이로 말미암아 애통하는 사람들과 한 입장이 되고 그들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 2016. 4. 1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자들 몇몇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무슨 대화를 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는 했지만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갈등하고 번민했던 것 같습니다. 도무지 답을 구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에서 아마도 무거운 침묵을 흘렀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하자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으나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라고 하시자 어부들은 그대로 하여 그물을 끌어 올릴 수 .. 2016. 4. 11. 예수님의 숨결 예수님의 숨결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어놓고 숨었다고 했습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웠다고 했지만 과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예수의 동료라는 것만으로도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야 있지만 전체적인 정황이 그렇게 긴박한 것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그들은 그 현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인들이 제자들을 색출해서 탄압하려고 했다는 증언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리마태오 요셉이나 니고데모 등이 침향을 섞은 몰약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안식일 새벽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 무덤을 찾아가기도 했.. 2016. 4. 3. 가두어 둘 수 없는 것 가두어 둘 수 없는 것 부활의 최초의 증언자는 막달라 마리아이었습니다.예수를 지극히 사랑한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어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배반하고 도망 간 것을 생각하면 그의 신실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합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간 줄로 알고 다른 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막 달려 온 제자들이 무덤을 확인할 때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예수는 더 이상 울지 말고 형제들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리라고 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현장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말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간 .. 2016. 3. 28. 두 명의 행운아 두 명의 행운아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길목에 두 사람의 행운아가 있습니다. 바라빠와 키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바라빠는 소요를 일으키고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무력으로 유다의 독립운동을 하던 열심당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반적입니다만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석방하는 관습에 따라 빌라도는 내심 죄를 찾아 볼 수 없는 예수를 석방할 요량이었으나 군중들은 바라빠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을 칩니다. 아마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할 때에는 다윗의 왕권을 다시 세워줄 영웅으로 기대했었지만 실제로는 예수께서 자기들의 의향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분노와 배신감으로 가득 찼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라빠는 뜻 밖에 엄청난 행운.. 2016. 3. 21.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3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