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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나눔

자비로운 정의(9일차)

by 분당교회 2020. 5. 29.

5월 29일 (금)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회 아래 기도문으로 기도하며, 아래 묵상집을 읽고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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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름다움에 대해 말한 것은 ‘정의’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체가 세상의 잘못된 것을 괜찮게 하시는 하느님에 관한 것이라면,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단 두 세 곳이라도 세상의 탈골된 지역에서 일하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여러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 세상에는 손님을 끌만한 많은 ‘정의 이슈들’이 있습니다. 사실 정의라는 단어는 너무나 과소평가되어 있습니다. 정의의 의미가 ‘나를 열 받게 하는 것’ 또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사람들이 ‘정의’의 진짜 이슈들을 간과하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와 그 개념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정의는 잘못 된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현하려면, 하느님의 아름다운 세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또 이 문제들을 잘 해결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교회가 세상의 잘못 되어있는 것을 바로잡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면, 장군들과 여타 압제자들이 무자비한 행동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피난하는 데에 관심이 없고, 세계 여러 곳에서 여성들을 대하는 그런 방식들에 대해 제대로 분노를 느끼지 않고, 부유한 은행가들이 수십 년 전에 무책임한 독재자에게 복리로 계산하여 돈을 끌어 모으는 엉터리 대출이 이제는 극빈자들에게 전가되고 있을 때 이를 대변하기를 게을리 한다면, 교회가 이런 문제들에 전혀 관심이 없다면, 여기에 덧붙여, 우리가

하느님께서 세상을 바로잡으실 계획이 있으시고 그 프로젝트가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착수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는다고 이상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심’에 대하여 설교하려 할 때, 하느님께서 복음을 믿는 모든 이들을 ‘바른 편에’ 서셨다고 선언하심으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날의 표지와 미리 맛봄으로 삼으신 이 큰 프로젝트에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설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러한 변명으로써 ‘믿음으로 의롭게 여기심’은 단순히 그리고 순순히 ‘하늘가는 것’에 관한 계획의 일부로 채택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로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었습니다.

 

자비로운 정의 또는 정의로운 자비는 복음의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게 할 적합한 ‘공명실’의 한 측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확실히 알게 된, 전도가 ‘전 교회가 수행하는 작전’ a whole-church operation의 날카로운 칼날, 즉 하느님 백성 전체의 생활 방식임을 부각시킵니다. 큰 회합에서 연사로서 이야기하는, 또는 불신자들이 개인적으로 신앙을 찾아가는 길을 돕는, 그런 재능과 소명을 누구나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향실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일에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이러한 소명을 받은이들이 자신감을 갖고, 예수의 복음이 더 넓은 세상과 ‘공명’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공동체는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며 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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