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나눔

근거 있는 주장 (10일차)

by 분당교회 2020. 5. 30.

5월 30일 (토)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회 아래 기도문으로 기도하며, 아래 묵상집을 읽고 묵상합니다.

012345

 

현대 과학으로부터 배운 것 중 하나가 또 다른 수준의 ‘이해하기’making sense(감각하기)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과학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 정도만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19세기에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이 정리되었는데, 그것은 아이작 뉴튼 Sir Isaac Newton이 ‘이해한’made sense 것이었습니다. 이를 기초로,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과학적 질문들을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나타나 갑자기 다른 방식으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뉴튼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불완전imcomplete했을 뿐입니다. 우주는 그런 기계적 사고방식의 시대의 뉴튼 또는 그 누군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입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이 ‘말이 되는가’ makes sense(이해되는가)에 대해 물을 때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공정합니다. ‘이해하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17세기와 18세기의 많은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회의론의 도전을 직면했습니다. ‘초자연’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복음이 ‘이해될 수’ 있는가(말이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답하려 하였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복음은 전혀 ‘말이 안되기’ not make sense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나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비판을 용인하는 것 뿐 인

것 같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성주의 회의론에 대응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성주의 용어로 환원하는 위험을 직시하고, 낭만주의 유형으로 물러섰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마음에는 근거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이 무시해 왔던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옆 집에 사는 이성주의자들이 당신에게 말도 안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격동하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고 일어서신예수께서 세상의 주인이시라고 선포할 때, 사람들을 사랑과 충성으로 초대할 때, 그 메시지는

그들을 사로잡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의미 있는’makes sense 것입니다. 그것이 현대 과학 또는 고대 역사 등등의 용어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그 합당한 충격을 발생시키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아름다움을 증진시키고, 자비로운 정의를 위해 일하는, 그 일들과 병행하는 임무(연구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때때로 불신자들이 예수 추종자들이 하는 일을 보고 회심을 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임무들이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끄는 데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점은, 복음의 의미가 그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함께 공명실들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신약이 확증하는 것들에 대하여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역사적 이슈들’historical issues을 다루는 것은 중요합니다. 1세기 유대 세계가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 상황 속에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은 어떻게 맞아 들어갔는지, 그들의 주류적인 사고들을 어떻게 고의로 전복하려 했는지에 대하여, 사람들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거나, 누군가가 지은 죄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누군가가 알맞은 감수성을 가지고 연구하여야 합니다. 이 거대한 사상들이 실지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역사가나 신학자의 임무들은 아름다움과 자비로운 정의의 임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알맞은 공명실의 일부로서, 예수의 온전한 복음을 명확이 전하고, 지적으로 설명하고, 또 믿게 되는환경을 이룹니다.

 

'신앙/나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조 질서를 위한 기도  (0) 2020.06.14
하느님의 구원 목적에 사로잡혀 (11일차)  (0) 2020.05.31
자비로운 정의(9일차)  (0) 2020.05.29
아름다움 (8일차)  (0) 2020.05.28
예수의 복음: 루가 4장(7일차)  (0) 2020.05.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