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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by 분당교회 2018. 4. 22.

2018년 4월 22일 나해 부활4주일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교회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성도들은 지체가 되어 주님의 몸을 이루는 이미지입니다. “성령의 전” - 하느님이 언제나 임재하시고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공동체의 이미지입니다. “가족” – 한 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오늘 서신 요한1서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의 이미지입니다. 그리고 “양떼”, 양떼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이미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들은 양떼인 교회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착한 목자이신 이유를 성경은 몇 가지로 제시합니다.


첫째,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기에 착한 목자입니다.

11절,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목숨을 바친다.”는 표현을 여러 번 반복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느님을 무시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세속과 정욕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 죄인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정의이기에, 사랑의 예수님은 자원하여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다시 살리시어 구원의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4:12,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둘째, 양들을 알고 있기에 착한 목자입니다.

14절,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지식 차원의 앎이 아니라, 관계적 차원의 앎입니다. 엄마는 아기의 울음만 들어도 배가 고파서 우는지, 응아를 해서 우는지를 압니다. 깊은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환히 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아시고 슬픔을 아시고 생각을 아십니다.


그래서 시편 139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4,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마태 6:8,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남이 나의 속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주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데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일일이 알고 기억해 주시니 얼마나 기쁘고 마음이 든든합니까?


셋째, 우리를 곧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에 착한 목자입니다.

시편 23:3,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인도하신다.’는 말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어깨를 맞대고 있는, ‘엘’-하느님. 우리를 환히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은 언제나 양들과 함께 하시며 곧은 길, the right paths. 올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다다르게 하는 곳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마음의 평안, 자족과 감사를 말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평화와 안식, 자족과 감사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이렇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떼인 교회를 위해 성직자를 세우시어 돌보게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소명이 교회에 이어져오는데, 역사적 주교직이라고 합니다. 주교는 사제를 파송하여 주교를 대리하여 교회를 돌봅니다. 다음 주일 이경호 베드로 주교님이 처음으로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데 뜨겁게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목자로 파견된 저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기도합니다. 언제나 목자의 마음을 품고 정성을 다해 여러분을 섬기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과 우정을 깊게 하며 여러분 보살피고 중보하고자 합니다. 심방을 하는 이유입니다. 또 여러분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사명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목자로 위임받은 베드로 주교와 저 엘리야 사제가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이제 여러분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착한 목자이신 주님에게 속한 양떼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목자에게 속한 양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 10:26-27,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 온다.” 여러분이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속한 양떼라면,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순종의 삶을 살 것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목자와 함께 있는 양은 자기가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나운 맹수가 나타나도 겁은 나지만 목자가 물리쳐 줍니다. 선한 목자를 따라가기만 하면, 푸른 초장에 가서 풀을 뜯고 쉴만한 물가에서 물을 먹으며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판단대로 길을 가면 낭패입니다. 혹 운이 좋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갈 수도 있겠지만 항상 그 삶이 항상 보장되는 삶이 아니기에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사나운 이리가 나타나도 스스로 대항하여 싸울 힘이 없습니다. 길을 몰라 헤매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고 가시덤불에 걸려 다치는 등, 지치고 곤한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은 그렇게 죽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길 잃은 양처럼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생들의 착한 목자가 되시고자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로 지금 그를 의지하는 연약한 인생들을 보호하시며 지켜주십니다.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요한 10: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이제 여러분의 선택이 남아 있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 안에서 평화와 감사가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내 생각과 경험을 의지하며 이리 저리 헤매는 길 잃은 양처럼 살 것인가?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매사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가운데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계획을 하느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합니다. 잠언 16:18, “거만에 재난이 따르고 불손에 멸망이 따른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선하신 목자임을 신뢰한다면,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된 목자이신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까요? 알파코스 11과에 나오는 지침을 정리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예들을 종합해 볼 때 5개의 ‘C.S.’라고 불리는 방법입니다. 


1. 성경을 통한 명령(Commanding Scripture)

보편적인 하느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일들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성경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면 더 이상 찾아 볼 필요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규칙적으로 정성을 들여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는 습관을 길러 나가면 매일 매일 성경 구절이 우리가 처해있는 특별한 상황에 얼마나 꼭 들어맞는지 놀라게 될 것입니다.


2. 성령의 통제(Controlling Spirit)

하느님의 인도하심은 개인적으로 각기 다른 것입니다. 신자가 된 우리 안에는 성령이 살아 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와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1) 성령님은 종종 우리가 기도할 때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오고 가는 대화입니다. 기도 중에 때로는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강한 느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이 성령님의 음성인지를 반드시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요한1서 4:1, “사랑하는 여러분은 자기가 성령을 받았노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다 믿지 말고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가? 사랑을 키우는 것일까?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인가(요한1서 4:16)? 그렇게 결정하였을 때 하느님의 평화를 누리는가(골로 3:15)?

 2) 성령님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주시는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필립 2: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의지를 내어 드리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은 종종 우리의 소망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3. 상식(Common Sense)

시편 32:9, “부디 철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말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자주 우리에게 생각하라고 격려합니다.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제재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2디모테오 2:7, “주께서는 모든 것을 다 깨닫는 힘을 그대에게 주실 것입니다.”


4. 성도들의 조언(Counsel of the saints)

잠언 12:15, “지혜로운 사람은 충고에 귀를 기울인다.”

  15:22, “의논 없이 세운 계획은 무너져도 중론을 모아 세운 계획은 이루어진다.”

  20:18, “중의를 모아 세운 계획이라야 이루어진다. 싸우려거든 먼저 작전을 잘 세워라.” 


조언이 필요할 때 누구와 의논해야 할까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므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조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조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선택은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정은 나의 책임입니다. 


5. 상황적인 증거들(Circumstantial signs)

모든 사건의 궁극적인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앞길을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감에 있어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신뢰 속에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감에 우리 모두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아직 우리가 목자이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훈련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 그것을 가지고 가장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 8: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를 의탁하고 따르기에 합당하신 착한 목자이십니다. 우리가 더듬거려도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깊이 생각하며 대화하고 기다리면서 주님의 뜻을 구하면, 착한목자이신 주님은 우리를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5월 11일에 개설되는 침묵기도학교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떼인 교회로 우리를 성숙시켜 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 중에 가장 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을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칩니다. 요한1서 3: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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