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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를 믿는다는 것!

by 분당교회 2017. 3. 13.

요한복음 3장 1절 ~ 17절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오늘 복음에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사이파이고 유다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바리사이파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열심있는 유다교 신자였다는 것이고 지도자라는 말은 아마 당시 유다의 통치 권력인 산헤드린 의회의 일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 성공회로 이해하자면 주교이면서 상원의원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위상이 높은 사람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 1장을 보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나타나엘은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겠소?” 라고 대합니다. 이렇게 예수는 촌구석 변방 출신입니다. 철저히 아웃사이더입니다. 그래서인지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라는 샘을 찾아온 목마른 인생을 대표합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며 살아 왔지만... 종교적인 지도자로 정치적인 지도자로 명예와 부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만족이 없고 사는 의미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목이 마릅니다. 그 목마름 때문에 동료의 손가락질이나 비난이 두렵지만, 어둠을 장막으로 삼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니고데모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셨나요? “목이 타는 사슴 떼가 시냇물 찾듯이 우리 영혼 주님 은총 간절히 바라네.” 우리가 찬양한 대로 오늘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은총을 축복합니다.

우리 주변에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사는 재미, 명예, 권력욕을 추구하고 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돈을 쫓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만족이 없고 공허하고 메마릅니다. 그래서 술이나 세상 쾌락에 빠지거나 돈 돈 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갈 때 그들은 우리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계속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런 기적’이란 2장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연상시킵니다. 구약에서 물은 정결례 때 사용되는 것으로 율법을 상징합니다. 포도주는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예수님이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하느님의 나라를 시작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


니고데모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2장 25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지만, 불확신과 내적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니고데모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새로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새로 나야 한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 무슨 말일까요?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하는 오늘 복음에서 니고데모와의 대화에 이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함께 암송해 볼까요?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앞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를 보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이란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면, “영원한 생명이란 참 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지식적이고 교리적인 앎이 아니라, 관계적인 앎을 말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 친밀함이 깊어지는 관계를 말합니다. 부부관계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죽어서 가는 내세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하느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삶을 표현하는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야 한다”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야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제시하신 인생의 해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 로마서 4장 3절에,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주일학교 때 부르던 노래가 기억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요. 그 중에 하나는 키가 크고요 나머지는 작데요.” 믿음의 아브라함을 살펴보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가 읽은 1독서가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대로 고향과 가족과 집을 떠납니다. 이는 하느님만을 신뢰했기에 가능한 순종입니다.
하느님만을 그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이것은 사랑으로만 가능한 전적 의탁입니다. 삶 전체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용기입니다.

여기서 ‘떠남’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11장까지의 스토리를 살펴봐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이후 사람들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고자 살아갑니다. 11장에 이르러 바벨탑을 쌓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에덴으로 상징되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왕국은 탐욕과 독점, 살인 등 죄악 위에 세워진 제국이었습니다. 힘을 가진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악의 질서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곳이 갈대아 우르가 그런 제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떠났다’는 것은 제국의 질서, 당대 세상의 가치관에서 벗어났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의 가장 중요한 사건인 출애굽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황제 파라오가 독재하는 이집트라는 제국을 탈출한 해방 사건이 출애굽입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세우고자 하는 나라,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세우고자 하는 나라는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왕으로 통치하시고 백성들은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 공의와 정의가 넘쳐나는 평화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창세기 18장 19절을 보면,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이것입니다.  “나는 그로 하여금 그의 자손과 그의 뒤를 이을 가문에게 옳고 바른 일을 지시하여 이 야훼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려고 그를 뽑아 세우지 않았던가?” 여기서 ‘옳고 바른 일’을 개역성경에서는 ‘의와 공도’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구약성서의 주제인 “미슈파트-정의와 쩨다크-공평”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알게 되는 믿음이란 하느님만을 신뢰함으로 제국의 질서를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를 향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의 모범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를 3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한 신뢰이고 전적인 의탁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는 인격적인 결합을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며 하느님과는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가 목마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나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을 주인으로 모실 때 친밀한 사귐의 삶이 시작됩니다. 목마름이 채워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재의수요일부터 사순 3주일까지 드리는 성체 후 기도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두 가지 목적을 경건한 삶의 모범, 희생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경건한 삶의 모범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럼 희생제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그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이 죄인인 이유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그들을 향한 정죄를 자신의 인격에 쌓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칠 때마다, 세리를 만나고 어울릴 때마다, 간음한 여인 앞에서 같이 돌을 던지지 않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돌로 쳐라’고 말씀 하실 때, 이렇게 사람들을 환대하시며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안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니고데모, 구에르치노 Guercino)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저주받는 자가 죽는 자리인 나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의 값을 다 치르는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코 10: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몸값을 치른다. RANSOM, 속량금, 보석금, 속죄, 지불하여 풀려나게 하다.

하느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26, 그분이 몸을 여러 번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이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사랑!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웅변합니다.
로마서 5: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거룩한 희생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나도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응답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응답이 하느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으로 충분한 믿음을 살게 합니다.

셋째,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길을 떠났다는 의미가 이것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부임하는 날 설교에서 강조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대안적인 거룩한 하느님의 공동체이다.”

한국 교회들은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참 쉬운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으면 됩니다. 그 믿음으로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생활도 잘 하고 더러 봉사활동도 합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생명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삶이 바뀌지 않은 채 자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을 믿는 것 같습니다.

믿음은 세상과 결별하고 세상과 등지는 것이 아닙니다. 맘몬의 지배 아래 욕망을 충족시키도록 살게 하는 제국의 질서를 초월하여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사는 것입니다.
관계적 분배적 정의 – 쩨다카, 사법적 정의 – 미슈파트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세우며 확장시켜 가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들은 니고데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7장에 가면 여러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발언하는 사람으로 잠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19장에 가면, 예수님의 장례를 치러주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나무 십자가에서 죽은 저주받은 죄인, 예수를 장례 치러주는 것! 제자들조차 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었는데 니고데모가 그 일을 합니다. 비로소 믿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며 제국의 질서를 초월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삶을 살아내는 믿음의 길은 니고데모의 경우처럼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누립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이 가장 존귀하고 보람된 인생입니다.

이 믿음의 길을 홀로 걸어간다면 힘들고 외로운 길이겠지만, 여기 우리 분당교회 공동체가 있기에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 기대며 서로 의지하며 서로 격려하며 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을 살아갑니다. 당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2017년 3월 12일 사순 2주 김장환 엘리야 신부 주일 설교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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