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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평화가 있기를!

by 푸드라이터 2013. 4. 8.

평화가 있기를!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4월 7일 부활 2주일 설교 말씀)


   불과 몇 분 뒤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탄광에 가두어 놓고 생체실험을 비롯한 야만적인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빅터 프랭클이라는 한 정신의학자가 이곳에서 살아남아서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였습니다. ‘밤과 안개’라고 하는 책에서 그는 한계상황에서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굴욕 속에서 한 조각의 빵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최후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언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섬세한 성질의 인간이 때때로 강건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보다 수용소 생활을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붕괴해버린 인간들만이 수용소 세계의 영향에 빠져 있었다.”고 프랭클은 말합니다. 그는 총검 앞에서도, 피로와 굶주림 속에서도 아내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떠오르는 태양보다도 더욱 나를 강하게 비춰주었다.”고 술회합니다. “비록 이 지상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다 해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마음을 바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 그는 그 모든 고통을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살아남은 사람들은 결코 신체적으로 더 강해서, 아니면 대우가 더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운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은 어떠한 곤경에 부딪혀도 삶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크의 증언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 구입 링크 : http://www.yes24.com/24/goods/1775518?scode=032&OzSrank=1)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국 우리는 같은 문제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제수용소나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어떤 사람은 돼지처럼 행동하는데 반해, 어떤 사람은 성자같이 행동합니다. 모든 인간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고 계실 때, 제자들은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음침한 골방에 숨어있었습니다. 행여 누가 들어 올까봐 문을 굳게 잠근 채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두려워 떨면서 숨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허망한 생각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생각일 것입니다. 죽으면 끝나니까 악착같이 자기 것, 세상의 것에 미련과 집착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살인이나 자살로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엉뚱한 충동도 일어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써 모든 기대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절망에 빠져 있었고, 죽음으로 자신들이 집착하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희망도 능력도 모두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그 상징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만 예수님이 부활하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시면서 손에 못자국과 창에 찔린 허리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를 보고서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상처는 우리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상처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다시 태어났습니다. 이전의 그들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거듭났습니다. 물질이나 권력으로 만드는 세상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숨결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평화가 그들 가슴을 적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박해와 멸시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닫쳐진 가슴을 열어 예수님의 숨결을 받으십시오. 죽음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성자가 되어 예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대한성공회 분당교회 주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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