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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거룩한 낭비

by 푸드라이터 2013. 3. 18.

거룩한 낭비

(20133월 17일 사순 5주일 설교 말씀)


만찬 중에 예수님 곁으로 마리아가 다가와서 매우 값진 나르드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유다는 ‘이 향유를 팔면 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것이고 이 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텐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며 책망합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의 행위를 두둔하며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리아가 저지른 막대한 낭비를 보고 분개한 유다와 제자들을 누가 감히 비난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나 복지 행정을 맡은 공무원 같으면 절대 유다의 입장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마리아의 행위를 죄악이라 생각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풍부한 사랑의 낭비 없이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여인 마리아, Dieric Bouts, 1440, Staatilche museen, Berlin


효율과 합리성의 울타리 안에 사로잡혀 있는 종교는 맥 빠진 종교이며 타산적인 사랑은 전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속에 얽혀있는 여러 가지 요소를 분석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여인의 넘쳐흐르는 마음을 이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그 마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폴 틸리히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이를 두고 ‘거룩한 낭비’라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을 낭비한 남녀들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이나 물질을 낭비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취한 태도와 똑 같이 합리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적인 공리주의에 빠질 유혹을 늘 받습니다. 더구나 선택과 집중이라는 효율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경쟁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의 방향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의 울타리 속에서는 창조적인 ‘거룩한 낭비’가 고갈될 수밖에 없고 풍부한 영혼의 활동을 사멸시켜 버립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즉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낭비할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병이 양산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사랑의 심성, 즉 자기 포기의 낭비와 모든 이성을 능가하는 영의 활동을 억눌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과 정력을 오직 유용하고 합리적인 일에만 쓰려고 아껴 둔다면 창조적인 사랑의 행위는 결코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 초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귀중한 가치와 대상을 위해서 자신의 한계와 욕망과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자기초월의 표상이며 ‘거룩한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그 십자가 사건에 가장 값진 것을 바침으로서 참여했습니다. 그 녀의 절절하고 순수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는 행위로 표출되었습니다.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어떤 의무감도 없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봉헌도 이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봉헌을 통해 어떤 결과물과 성과를 바란다면 진실 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장기용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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