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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시리즈 : 프레드릭 데니슨 모리스(Frederick Denison Maurice 1805-1872): 그리스도 왕국의 신민 사회주의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23.

성공회 영성가들 중엔 유독 글 잘 쓰는 사람들도 많고 시인도 많았지만 F.D. 모리스의 글 솜씨에 대해서는 별로 칭찬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장광설에 가상의 적과 주고받는 토론을 잔뜩 집어넣어서 몹시 글의 밀림을 치는 작가,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쉽게 파악하기 힘든 고약한 작가였던 모양입니다. 문체만 그런 게 아니고 모리스 자체가 생각을 복잡하게 하는 인물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리스는 급진주의자로 비치기도 하고 반동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고교회파로, 어떤 때는 저교회파로 해석되기도 했고 지식인과 행동가 사이에 무게 추가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교회일치주의자 같고 어떻게 보면 성공회를 내세우는 논객 같기도 합니다. 이 모든 해석의 입장이 그의 복잡한 글 숲 어딘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니 좋게 말하면 이런저런 사고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모습이라 할 수도 있고 나쁘게 보자면 명료한 글쓰기가 아니어서 독자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드는 인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양극성의 요소들이 밀림처럼 혼합된 모리스의 글과 사고에 구심력으로 작용하며 중심을 잡는 신념이 있었으니 곧 “그리스도는 왕이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셔야 한다거나 장차 왕이 되실 거라든가 그런 얘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분은 우리의 왕이시라는 겁니다. 그것도 신앙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 해당하는 진리로 모리스는 믿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이 세우신 질서가 있는데 그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고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모든 인간이 그 질서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모리스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한 핵심신념이 있다면 바로 이 왕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복잡한 언설은 모두 이 신념을 태양처럼 중심에 놓고 각기 다른 궤도로 공전하는 행성들처럼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리스가 살던 19세기는 성공회 복음주의자와 가톨릭주의자들이 세례를 놓고 입씨름이 있던 시대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마음의 회심이 먼저 있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세례이며 회심이 따르는 세례라야 구원의 효과가 있는 걸로 보았습니다. 반면 앵글로 가톨릭들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전자가 좀 개인-내면적이라면 후자는 신앙의 집단-외적인 차원을 강조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세례를 받지 않은 교회 밖의 사람들은 하느님 밖에 있는 걸로 본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리스는 세례를 “부단한 일치의 성사”(the sacrament of constant union)라 부르며 세례는 다만 이미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었음을 자각하고 표명하는 예식이라고 했습니다. 즉 없는 것을 새삼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드러내는 성사가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 ‘이미 있음’이란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음입니다. 그러니 세례로 신분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러했던 사실을 공표할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천국과 지옥을 놓고도 모리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내세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경험이라고. 영원은 한없이 긴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즉 시간성 너머의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며 따라서 영벌의 지옥이란 끝없는 형벌의 시간이 아니라 죄 그 자체,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걸로 본 것입니다. 당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과 지옥을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가르침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람들이 죄 된 성향을 억누르고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식이었음을 생각할 때 모리스의 견해는 가히 파격적입니다. 세례관도 그렇지만 이러한 지옥이해 때문에도 모리스는 보편구원론자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든 안 받든, 신앙이 있든 없든 모든 사람이 구원 받는다는 것이 보편구원론인데 사실 모리스는 명백히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굳이 부정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리스는 성공회의 폭넓은 교리이해에는 보편구원론적 입장의 여지가 있다고 본 듯합니다. 여하튼 이러한 관점이 시비가 되어 모리스는 1853년 런던 킹스 칼리지의 교수직을 박탈당합니다.

하지만 일 년 뒤 그는 런던에 “노동자대학”(Working men's College)을 세웁니다. 이미 1848년에도 모리스는 여성을 위한 퀸스 칼리지 설립에도 관여한 바 있으며 이때 여성도 남성과 같은 커리큘럼으로 교육 받게 하자는, 당시로선 혁명적인 입장을 내세웁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왕이시라는 확신, 그러므로 노동자들도 여성들도 모두 형제요 자매라는 확신에서 모리스는 그렇게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같은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조장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왕이신 사랑의 왕국, 그 안에서 모두가 형제자매인 하느님의 나라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와는 달리 모리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는 폭력을 혁명의 수단으로 삼거나 국영생산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대하고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근간으로 해서 나라의 경제도 돌아가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왕과 관료가 이러한 정신으로 일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도구가 되고 범인간애라는 방향에서 교회와 국가는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걸로 보았습니다. 한편 모리스에게 주권을 백성에게 돌리는 민주주의란 어처구니없고 하느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의 왕이시라는 모리스의 신념에서 볼 때 교회의 분열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류는 관두고 교회들조차 한 왕 그리스도를 모시는데 실패하고 있는 게 아니고 무엇입니까! 각각의 교리적 입장이나 제도를 고집하지 말고 밑바탕에 흐르는 공통의 진리를 찾으려는데 집중한다면 교회의 일치는 가능하다고 모리스는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드러낼 수 있는 교회의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모리스는 역사에서 교회의 보편적 요소를 찾아 6가지로 제시하는데 곧 1) 세례, 2) 신경, 3) 예배양식, 4) 성찬례, 5) 성직, 6) 성서입니다. 이 공통의 기반을 조건으로 하면 어느 교회와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1888년 람베스회의는 “람베스 4개항”(the Lambeth Quadrilateral)이라는 것을 내놓는데 1) 성서, 2) 신경, 3) 세례와 성찬례, 4) 성직(특히 역사적 주교직)이 있는 교회라면 어디와도 형제로 상통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모리스가 제시한 데서 예배양식만 빼고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문서는 이후 성공회가 타 교단과 일치하려는 노력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도 크나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리차드 후커나 랜슬럿 앤드류스를 거쳐 F.D. 모리스에게도 이어진 보편지향의 성공회 정신이 람베스회의에서 분명한 이정표로 세워졌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한편 모리스가 교회일치를 위해 넓게 금을 치는 이 대목에서 그의 성공회 선전가 같은 면도 등장합니다. 모리스가 볼 때 가톨릭(“보편되다”는 의미에서)교회로서의 6가지 요소를 가장 잘 갖고 있는 교회가 성공회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약점도 없지 않지만 교회의 보편적 모습을 가장 잘 구현한 교회가 성공회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다른 교파들더러 때려치우고 성공회로 통합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각기 자기 지역과 상황에 맞게 보편교회의 요소들을 개성 있게 구현하면 그만입니다. 이러한 모리스의 태도 또한 성공회의 자의식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성공회는 자신이 가톨릭 즉 보편교회의 요소를 영국적으로 표현하는 교회로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회는 자신을 전체의 한 부분이요 독특한 한 표현으로 여기는 자의식이 있습니다. 여기엔 다른 표현, 다른 개성을 용인하는 넓은 공간이 있고 다른 교회들과 더불어 전체를 이루는 것이란 의식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교회의 획일성 통일지향과는 기본태도가 다른 것입니다.

F.D. 모리스를 읽으면서 그가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왕이시라는 확신, 성공회는 보편교회의 특성을 고루 구현한 교회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구심으로 해서 넓게 다른 교회 및 사회를 향해 원심력을 발휘한 인물임을 음미해 봅니다. 덩치 큰 다른 교회들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누군지 헷갈려 하면서도 세상을 향해 활발한 선교 동력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새삼 생각해 봅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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