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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시리즈 : 찰스 시므온(Charles Simeon 1759-1836): 설교강단의 혁명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27.

찰스 시므온은 성공회의 풍모에서도 설교라는 측면에 크게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그의 설교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성서로 말하게 하라”는 대원칙 하에 시므온은 설교자는 성서본문을 분석하되 본문의 역사적 상황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문자적 의미를 외면하지 말되 거기 국한되지도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 주류 신학교가 성서의 ‘역사적-은유적’ 해석을 지지하고 있음을 볼 때 가히 선구자적인 지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교회가 너무나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보여 교회 바깥사람들에게 냉소와 비난을 받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성서의 ‘문자-사실적’ 해석에 기대는 탓입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이미 2세기 전에 설교는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문자 이상의 의미를 보려는 데 기초해서 해야 한다고 말한 인물이 있습니다. 단순히 그 한 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찰스 시므온에게 설교학을 배운 사람은 당대 신학생 1,100명 가량이었다 하니 가히 성공회풍의 설교를 그 시대에 정초한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므온도 출발은 평탄치 않았습니다. 그가 23세의 나이로 아직 사제서품도 받기 전에 캠브리지의 성삼위일체(Holy Trinity) 교회에 발령을 받자 그 교회 사람들은 반갑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에 보좌로 일했고 자신들과 친숙한 존 해몬드 신부가 부임하길 원했는데 뜻밖에 주교는 잘 알지도 못하는 새파란 찰스 시므온이란 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러자 회장단은 각 가족들에게 할당된 교회좌석 문을 잠그고(당시 교회들은 오늘날 운동경기장의 VIP관람석처럼 주요가족들에게 좌석을 배정했다고 함) 시므온이 집전하는 예배에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시므온은 자기 돈으로 의자를 사서 측면에 놓아봅니다만 이 또한 들어내서 교회 마당에 내동댕이칩니다. 그리고 시므온보다 두 배의 사례비를 주면서 존 해몬드를 불러 오후에 자기네들끼리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런 집단반발과 저항 때문에 시므온은 여러 해 동안 교회 뒤편 서서 예배드리는 입석의 빈민신자들만을 대상으로 집전하고 설교하는 곤욕을 치룹니다. 하지만 성서를 설교하고픈 열정에 불탔던 시므온은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성직자가 없는 시골의 작은 교회들에서 무보수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점차 이 교회들은 시므온의 설교를 기뻐하는 신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찰스 시므온이 캠브리지 성삼위일체 교회에서 향후 45년이나 머물면서 당대 최고의 설교가요 성공회의 설교풍을 크게 바꿔놓는 인물이 되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므온 시대의 설교는 한 마디로 건조했습니다. 설교자들은 원고에 코를 박고 한 줄씩 읽어 내려갔고 그나마도 남이 대필했거나 책에서 베낀 원고였습니다. 스스로 성서를 묵상하고 거기서 설교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교의 내용도 지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라는 정도로 그치지 삶을 뒤집도록 도전하는 설교 같은 건 가당치 않았습니다. 자기만족적이고 미온적인 신앙에 적합한 무미건조한 설교가 당대의 강단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므온은 스스로 성서를 읽고 스스로 설교를 쓰는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설교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 열두 시간 정도 소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설교하기 일쑤인 시므온은 오로지 설교만을 생각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으로 일상이 채워졌을 것입니다. 우선 새벽 네 시면 일어나 꼬박 네 시간 동안 성서를 읽으며 묵상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입니다. 시므온의 설교는 이렇듯 성서와 친하게 지내는 삶, 묵상하는 삶을 바탕으로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18세기 성공회는 감정만을 중시하는 열광주의를 불신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나치게 머리형으로만 흐른 것이 당대 성공회 강단이었습니다. 시므온도 반지성적으로 감정만 자극하는 설교는 불신했습니다. 다만 지성과 감정에 다 전인적으로 호소하는 설교를 성공회에 되살려놓았을 뿐입니다. 성공회의 정체성을 흔히 ‘포괄성’(comprehensiveness)이라 하거니와 성공회적인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하는 식으로 찾기보다 ‘이것도 저것도’ 포괄적으로 통합하는 풍모에서 보아야 한다고 믿는 저로서는 시므온의 설교야말로 그 풍모를 구현하는 것으로 봅니다. 참나무도 전나무도 아닌 무엇을 찾기보다 참나무, 전나무 등 전부와 더불어 ‘숲’을 구성하는 기풍(ethos)이 ‘성공회적’인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깊은 성서묵상과 공부를 바탕으로 지성적이면서 감성에도 어필하는 설교를 주창한 시므온은 가히 성공회풍의 기여자로 기억할 만합니다.

부임 후 8년째인 1790년 회장단이 바뀌면서 성삼위일체 교회는 드디어 좌석에 신자들이 앉을 수 있게 됩니다. 1800년대 초에 이르면 이 교회에 주일이면 천 명 이상이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일상적이리만치 성장합니다. 이전에는 성삼위일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공회 교회들이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이를 두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잃지 않기 위해 교회를 작게 유지하려는 교회원로들의 “창조적 노력”도 한 요인이었다고 꼬집는 글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선교명령을 시야에서 잃으면 그런 헤게모니 게임이나 하게 되는가 봅니다. 한편 시므온은 교회를 키워가는 한편으로 교회로 신학생들을 초청해서 설교세미나를 엽니다. 시므온 자신 신학교에서 도무지 설교에 관한 가르침을 접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설교뿐만 아니라 다른 사목적 훈련도 제대로 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서품을 받으면 저절로 다 하게 되어 있다는 식이어서 신학생들은 전투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임관해서 알아서 총 쏘는 법이며 통솔하는 법을 체득해야 하는 장교들 비슷한 신세였습니다. 이러한 때 시므온의 설교세미나는 학교의 정식 커리큘럼은 아니지만 신학생들의 호응을 얻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여러 모로 성삼위일체 교회는 당대의 영국 성공회에 영향을 끼치는 자원이 된 것입니다.

당대 영국 성공회에는 역기능적 중세풍이 하나 있었으니 봉건영주가 자기 지역의 성직자를 임명하던 관행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찰스 시므온 당시 이 봉건영주의 권리는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돈 많은 지역의 몇 가족이 교회를 자기네를 위한 채플쯤으로 여기게 되고 사들인 성직지명권으로 아들이나 조카를 신앙심이 없어도 성직자로 앉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이 볼 때 이는 큰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체험도 없고 성서가 소중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설교강단에 올라야 하니 남이 써준 글이나 코 박고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므온은 물려받은 유산과 그가 쓴 유명한 설교전집(호레 호밀래티케)의 판매수익으로 열심히 성직지명권을 사들여 그에게 훈련받은 열심 있는 성직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 창설에도 관여합니다. 시므온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영국 내 주요도시엔 그의 영향을 받은 유능한 성공회 사제들이 들어가 복음주의적 부흥을 불러옵니다. 사실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추종자들이 대거 성공회를 떠남으로써 성공회의 체질변화는 좀 더 후기, 즉 찰스 시므온의 시절부터 가시화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시므온 이래 복음주의 영성을 가진 사람들도 성공회를 떠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도시선교와 해외선교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 한국 성공회 현실의 많은 면들이 찰스 시므온 이야기와 겹치리라 생각하지만 그의 출발점이요 무기가 깊은 성서묵상에 바탕한 설교, 역사적이면서 문자주의를 뛰어넘는 설교, 감정에 호소하되 결코 반지성주의적이지 않은 설교에 있었다는 점 정도를 짚기로 합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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