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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시리즈 : 존 키블(John Keble 1792-1866): 교회다운 교회를 찾아서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27.

1833년 7월 14일 옥스퍼드 성 마리아교회에서 당시 41세의 존 키블 신부가 “온 나라의 배교”(National Apostasy)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을 때만 해도 이 설교가 향후 몇 십 년을 지속하면서 성공회의 자아상을 크게 바꿔놓을 운동의 시초가 되리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키블 자신도 몰랐을 겁니다. 청중들에게서 대단한 반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얘기를 전해들은 왕의 판사 중 하나도 “뭐, 좋은 얘기군!” 하는 정도로 반응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열흘 뒤 네 명의 젊은 신부들이 모여서 설교를 놓고 토론한 뒤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이들은 소책자들을 쏟아냈고 사람들은 여기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존 키블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운동을 일으키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맑은 신앙심이 있는 인물 정도, 6년 전에 전례력을 주제로 내놓은 묵상집 정도로 사람들은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러나 키블은 내심 교회의 현실에 마음이 부대끼고 있었고 마침내 그날의 설교로 안타까움을 분출했던 것입니다. 계기가 된 사건은 당시 영국의회가 아일랜드 성공회의 32개 교구를 22개로 축소하기로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아일랜드는 천주교 신자가 다수인 가운데 성공회 신자가 10분의 1을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32개 교구 주교들은 형편에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생활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비용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국가가 부과한 십일조로 충당하는 셈입니다. 키블도 아일랜드 성공회가 새로워질 필요가 있음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의회 같은 세속의 기구가 교회문제를 결정하는 상황이 불편했습니다. 교회가 군대나 공무원 같이 국가의 하위기관인가? 아니라면 오늘 성공회의 이 모습은 과연 무엇인가? 대체 교회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키블의 속을 시끄럽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의회의 결정만이 키블을 어지럽혔다고 보아선 안 됩니다. 오히려 존 키블을 좌절시키고 있었던 것은 교회의 현실이었습니다. 당시 성공회는 선교적 중심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선교가 중심이라야 할 교회에 그것이 없다면 이 교회란 정녕 교회인가? 성찬례는 어쩌다 한번 드렸고 견진은 옷 잘 빼입고 교회 가서 가족끼리 친교하는 즐거운 행사 정도로 치부됐습니다. 예배는 조야(粗野)했고 사람들은 건성이었습니다. 신자생활이란 그저 세상에서 자선기부금이나 조금 보내면서 친절하게 살면 그만인 정도로 인식됐습니다. 작은 교회 성직자들은 극빈계층이나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는데 주교들은 호화판입니다. 진지한 소명이 있다기보다 다른 건 할 수 없는 함량미달자들이 생계수단으로 성직을 선택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모든 걸 당연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키블은 이러한 교회의 상황에 깊이 상처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의회의 결정이 나오자 “우리가 정말 교회가 맞는지 돌아보자!”고 포문을 연 것이 “배교” 설교였던 것입니다.

키블의 설교를 기점으로 태동한 운동을 “옥스퍼드 운동”이라 부르는데 지도자들이 모두 옥스퍼드 대학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트랙태리언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트랙트, 즉 소책자를 소통의 수단으로 해서 전개된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책자를 통한 신학적 담론의 확산이란 당시에도 좀 낯선 방식이었는데 저비용에 빠른 확산을 기대할 수 있어서 운동 지도자들은 이 방식을 택했던 것입니다. “시대사조”(Tracts for the Times)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이 소책자들은 1833년부터 1841년까지 8년간 90개가 간행됩니다. 처음엔 익명으로 출판했으나 나중에는 글쓴이를 드러냈고 뒤로 갈수록 단행본에 가까운 크기가 되었습니다. 모두 14명의 저자가 글을 공급했고 키블은 90개 중 8개를 썼습니다. 그 중 하나는 키블이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혼배성사를 베푸는 현실을 개탄하며 교회의 성사는 아무한테나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직 헌신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회가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는 은총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논지를 밝힌 것입니다.

옥스퍼드 운동이 점차 존 헨리 뉴먼의 주도하에 진행되면서 키블은 1836년부터 윈체스터 허슬리 본교회 사목에 집중합니다. 이때부터 키블은 죽을 때까지 허슬리에서 사목자와 작가로 살게 됩니다. 하지만 옥스퍼드 운동 내의 역할도 끝난 것은 아닙니다. 뉴먼은 열심히 애를 썼지만 현실이 별반 달라지는 것 같지 않자 마침내 실망하고 천주교로 옮겨가고 맙니다. 이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거 봐라, 옥스퍼드 운동이란 결국 겉만 성공회였지 속은 천주교 회귀운동 아니었냐!”라고 비난했습니다. 뉴먼이 떠나자 키블은 에드워드 보베리 퓨지와 더불어 옥스퍼드 운동을 이끕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엄마와 나란히 선 아이처럼 성공회를 어머니교회로 삼아야 한다고 천명했습니다. 다만 이 성공회 안에 초대교회의 전통을 되살리고 교회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운동일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키블 자신 허슬리의 교회를 옥스퍼드 운동의 원리를 따라 사목하는 교회로 삼았습니다. 키블은 1866년에 죽습니다만, 이때쯤엔 수천, 수만의 교구와 교회들이 이 운동의 영향을 입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아는 매주일 성찬례, 예복, 성사예식들은 다 이 운동이 초대교회의 전통으로서 회복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성공회 수사와 수녀들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이 운동이 성공회 내에 수도원 전통을 되살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19세기 전 세계적인 수도원 운동의 부흥은 성공회가 옥스퍼드 운동을 통해 수도원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자극을 받아서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성공회의 모습은 옥스퍼드 운동의 산물입니다.

존 헨리 뉴먼은 천주교로 건너가서도 추기경까지 되고 후일 성인 시성까지 받습니다. 그런 인물을 놓친 것은 아깝지만 키블과 뉴먼은 서로 친하면서도 전통의 이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뉴먼은 전통은 계속 진화하는 것인지라 교황 무오설이나 성모 몽소승천 같은 교리도 더해질 수 있는 걸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키블은 교회가 분열되기 이전 최초 다섯 세기의 전통을 순수하게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리차드 후커나 랜슬럿 앤드류스 같은 성공회 사상가들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 최초 5세기의 전통을 성서에 바탕한 순수함을 깨지 않았던 시기로 보는 것입니다. 한 명이 천주교로 가고 한 명은 성공회에 남은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키블이 “전통은 기록된 말씀을 충분히 가르치려는 것이며 성서는 전통이 가르치는 바를 확인하고 조명하는 것”이라 했을 때 이 처음 다섯 세기의 전통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키블과 옥스퍼드 운동은 성공회를 교회답게 하려면 이 처음 세기의 전통을 회복하는데 열쇠가 있다고 본 운동입니다.

물론 후일 F.D. 모리스 같은 사람은 옥스퍼드 운동이 당대의 사조를 반대하려고 과거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늘 살아 활동하시는 성령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약점이 있다고 비판하기는 합니다. 약점 없는 사람이 없듯 약점 없는 운동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옥스퍼드 운동이 가져다 준 큰 선물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영국도 이때부터 정부가 교회를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교회이해가 서서히 싹터 오늘날과 같은 다분히 독립된 교회로 나아가게 됩니다. 세계 성공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고 성직의 소명과 기준을 높이고 안으로는 교회가 빈민들 틈에 들어가 슬럼가에서 선교를 하게 하고 해외로 선교를 넓히고 문 닫은 교회들을 되살리는 한편 새 교회들을 세우고 성가와 묵상집들을 쏟아져 나오게 한 것이 옥스퍼드 운동입니다. 옥스퍼드 운동을 성공회 내의 가톨릭 운동으로 말합니다. 분명 복음주의 영성과는 외양이 다른 듯하지만 이 운동이 교회에 선교중심성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출발한 운동임을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옥스퍼드 운동 또한 복음주의 운동과 같은 출발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서로 색깔은 다른 듯하지만 성공회는 이 두 운동을 통해 갱신되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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