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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 시리즈 :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국외자 반동 게릴라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5.

감리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존 웨슬리가 왜 성공회 인물시리즈에 등장하는지 의아할 분들도 있겠으나 웨슬리는 평생 자신을 좋은 성공회 신부로 알고 살다 죽은 인물입니다. “저녁에 나는 그리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가의 모임(모라비안교도들의 모임)에 갔다. 독서자는 마침 루터가 쓴 로마서해설 서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9시 15분 전쯤 독서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일으키시는 변화를 낭독하는데 마음이 희한하게 따스해졌다. 내가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 한분만을 신뢰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내 죄가 걷혔다는 확신, 내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의 이 경험담은 흔히 웨슬리의 회심체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경험의 의미를 확대하든 축소하든 정작 웨슬리 자신은 “회심”(conversion)이란 표현을 쓰지도 않았고 이후 이 경험을 다시 언급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올더스게이트 체험이 웨슬리에게 모종의 전환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웨슬리의 “회심”경험만을 강조하는 것은 영성생활에서 자칫 균형감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회심의 논리적 위치에 성령세례를 갖다 놓든 명제적 동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놓든 그렇습니다. 개신교가 전반적으로 점진적 수행의 구조로서 수덕신학을 상실하고 있는 면이 혹자의 표현대로 “거룩함에 뚫린 구멍”(sanctification gap)으로 작용하는 면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전례영성을 갖고 있는 성공회의 “좋은” 사제로 살았던 웨슬리가 자신의 회심경험을 간단히 한번 기술하고 끝난 이유를 웨슬리가 영성생활에 대해 성공회적 전체성의 시야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웨슬리는 이전에도 신앙적 체험이 없지 않았고 올더스게이트 체험 불과 몇 달 전에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북미에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올더스게이트 이후 웨슬리 삶의 톤과 강조점이 달라진 걸 보면 분명 그 체험이 어떤 전환점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이전엔 강박적 의무감으로 종처럼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후엔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자녀로 살았다 하겠습니다. 나무는 열매로 압니다. 이런 열매를 내놓지 않는 체험은 지푸라기 취급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오랜 지혜입니다.

존 웨슬리의 부모 얘기를 좀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웨슬리의 아버지도 성공회 신부였습니다. 워낙 사람이 엄격해서 한번은 자기 부인이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일 년이나 별거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웨슬리의 어머니는 따스한 신앙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모성애의 화신 같은 인물입니다. 자식을 열아홉이나 낳았는데 그 중 아홉을 일찍 잃습니다. 따뜻하게 품고 상실을 슬퍼하는 모성애의 온갖 측면을 웨슬리는 어머니를 통해 목도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웨슬리의 회심이란 강박적 옳음에 집착하는 아버지에게서 가슴의 따스함으로 늘 한결 같은 사랑을 보인 어머니로 옮겨가는, 하느님의 모성애를 깨닫는 통합의 과정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존 웨슬리의 영성에서 두드러진 것은 성공회 영성답게 균형과 통합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이 성공회 복음주의의 원조는 매우 가톨릭적인 영성을 드러냅니다. 정기적으로 영성체를 했고 죽을 때까지 동료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할 정도로 전례적 영성을 지녔던 것입니다. 후일 “감리교”라는 명칭이 된 메쏘디스트(Methodist)란 질서 있고 엄격한 수덕적 구조와 방법(연구, 기도, 선행)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웨슬리와 동료들의 풍모를 좀 비아냥거리는 톤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하지요. 본디 앵글로 가톨릭주의자인 아버지의 아들답게 그도 질서와 전통을 중시하던 사람이고 심지어 가슴 뜨거운 즉각적 체험을 강조하게 된 올더스게이트 이후에도 바른 사고와 행위로 전체성을 갖추는 균형은 웨슬리에게서 사라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웨슬리의 신학도 전체적으로 보면 16세기 이래 영국 성공회 개혁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웨슬리가 주류에서 소외된 국외자가 된 것은 18세기 이성주의의 영향이 깊었던 당시 성공회가 종교적 열광주의를 지나치게 두려워한 탓이라고 합니다. 올더스게이트 이후 웨슬리는 분명히 가슴의 뜨거움과 직접적 경험을 강조하는 면이 뚜렷했고 열광주의는 거의 폭도 취급을 받던 당시 교회 분위기에서 웨슬리는 점점 입지가 좁아졌던 것입니다. 교회로 발령을 받지 못하니까 설교초청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갈수록 웨슬리를 불러주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자 동료 조지 화이트필드의 권고로 야외설교를 하게 되는데 처음엔 내키지 않아 했지만 마침내 평생 25만 마일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4만 번이 넘는 즉흥설교를 하는 웨슬리의 전설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야외설교와 교구 및 관할지역을 무시한 전도여행이 가슴 중심의 영성과 함께 당시 교회권위자들을 불편하게 한 요인이었던 것입니다.

웨슬리 당시 영국사회는 큰 변화를 겪는 불안정한 사회였습니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은 죽고 공장이 서면서 도시인구가 급증했습니다. 갑자기 등장한 도시빈민과 신흥노동자 계급은 교회의 전통적 교구와 관할지역 제도를 통해 제대로 접근할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적 열정이 없이 같은 부류끼리 폐쇄적으로 어울리는 점잖은 클럽 같은 당대의 성공회는 이들을 사목하기엔 무력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회현실은 급격히 변했는데 당시 교회는 기존의 문화와 틀을 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웨슬리는 정규군이 무력하자 게릴라전을 펼치듯 신앙의 게릴라, 문화적 게릴라로 복음전도를 했던 것입니다.

성공회는 국교이다 보니 그 DNA에 ‘전도’란 없다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식민주의 성공회(Colonial Anglicanism)의 단층, 즉 영국 관료와 군인들 가족에게 채플린 노릇이나 하는 교회와 성직자 모델 밖에 경험한 적이 없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웨슬리 이후의 성공회 복음주의 운동, 19세기 옥스퍼드 운동 등은 명백히 전도와 선교의 동기에서 비롯된 성공회 단층입니다. 당시 전 세계적인 부흥을 주도한 부흥사들은 거개가 성공회 신부들이었습니다. 웨슬리는 말을 타고 힘들게 전도여행을 다니는 중에도 늘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성공회 복음주의는 균형을 잃은 복음주의의 반지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말 위에서 책에 코를 박고 주류에서 소외된 채, 그러나 교회가 눈 돌리지 않는 곳을 찾아 세상을 헤맨 존 웨슬리는 성공회의 선교적, 사목적 영성의 분명한 한 아이콘입니다. 성공회는 ‘교회는 늘 개혁하는 곳’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습니다. 비록 18세기 성공회 주교들은 웨슬리를 끌어안는데 실패했지만 18세기는 성공회 복음주의의 세기입니다. 이 단층이 있어 성공회는 오늘날 세계적인 커뮤니온이 되었습니다.

18세기의 무미건조한 신앙과 극도의 이성주의에 실망한 나머지 성공회는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웨슬리 같은 국외자, 그러나 복음의 게릴라들이 나타나 성공회는 오히려 위기를 딛고 세계적인 교단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한 성공회는 어찌할 것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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