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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 시리즈 : 랜슬럿 앤드류스(Lancelot Andrewes 1555-1626)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5.

랜슬럿 앤드류스는 치체스터, 일리, 윈체스터 등 3개 교구에서 교구장을 역임한 명망 높은 주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매일 다섯 시간 이상 기도와 묵상에 몰두하는 것이 앤드류스의 일상이었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그를뛰어난 설교가와 학자로 기억합니다. 깊은 기도와 묵상에서 우러나온 내용으로 설교하고 글을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앤드류스는 성서도 꼼꼼히 분해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어원적으로 분석하며 읽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꼼꼼한지 후대의 T.S. 엘리엇조차 그의 글을 읽고는 “의미의 진액이 다할 때까지 짜내고 또 짜
내는 식이라 우리가 어느 단어의 의미를 섣불리 안다고 말하기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불평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사람들이 읽기에는 편치 않은 저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의 존 돈과는 서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사이였다고 하지만 존 돈의 글이 오늘날도 줄곧 읽히는 반면 랜슬럿 앤드류스의 글은 그렇지 못한한 가지 이유가 거기 있을 것입니다.

앤드류스는 처음엔 학생으로서 후엔 학감으로서 캠브리지에서 20여 년을 지냅니다.그런데 얼마나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지 거의 매년 새로운 언어 하나씩을 익혔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는 무려 열다섯 개의 언어에 능통했다지요. 그러한 언어적 재능 덕분에 앤드류스는 유명한 킹 제임스 성서번역에 참여하여 구약의 첫 열두 권 번역을 책임지는 위원회 위원장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도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이 세 가지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쓴 기도문이 사후 출판될 때는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그런데 앤드류스는 리차드 후커와 더불어 성공회의 독특한 신학적 태도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인물로 꼽힙니다. 기본적으로 가톨릭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그는 한 설교에서 “하나의 표준(즉 캐논으로서의 성서), 두 계약(구약과 신약), 세 신경(사도신
경,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네 공의회(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페소, 칼케돈), 그리고 분열을 경험하기 이전의 첫 다섯 세기와 그 시기 교부들이 우리 신앙의 경계선”이라고 명시했습니다. 성공회는 신학적 이슈를 다룰 때마다 성서와 더불어 초기 신경 및 교부들의 저술에 기대어 근거를 확립하는데 앤드류스야말로 그러한 태도를 하나의 기준으로 명시한 인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랜슬럿 앤드류스 역시 성공회풍의 확립에 기여한 인물로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지요.

앤드류스는 한 마디로 반듯한 사람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보다 좀 어렸던 존 돈이 들쭉날쭉하고 속취(俗臭)의 모순된 인물이었던 것에 비하면 앤드류스는 늘 균형과 질서, 계획성을 갖고 꾸준히 안팎의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이 성직의 길에 들어설 것을 알았고 소명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성격도 강직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교회의 기금을 끌어다 멋대로 정치에 쓰자 그 항의표시로 교구장직을 내놓습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제임스가등극하여 치체스터 교구장으로 임명하는 바람에 세 번이나 교구장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국왕 제임스의 궁정 설교가이기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판이란 것이 저열하고 탐욕스러워서 온갖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궁정이었지만 앤드류스는 하루 다섯 시간의 기도와 묵상, 성서주해에 바탕을 둔 설교로 한결 같았기 때문에 거기서도 존경 받는 성직자였습니다.

그가 방대한 독서에서 얻은 여러 자료로 개인 기도서를 만들고 혼자 기도할 때 천천히,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스며들 때까지 씹고 또 씹으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을 세 언어로 이리저리 음미했던 것도 묵상을 깊이 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지요. 랜슬럿 앤드류스의 이러한 기도서 사용법은 오늘 우리에게는 도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회는 기도서의 영성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우리는 성찬례의 기도문들이나 기도서를 너무 쉽게 피상적으로 대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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