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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시리즈 : 찰스 고어(Charles Gore 1853-1932): 앵글로 가톨릭 모더니스트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2. 23.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교회의 가르침은 이런저런 공격을 받게 됩니다. 1859년에 등장한 다윈의 「종의 기원」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 사실이 아니라고 도전합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학자들이 문학과 역사비평의 도구들을 응용해서 성서본문의 저자 및 정확성에 의문을 던집니다. 심리학과 물리학의 새로운 조류 역시 종래의 인간과 자연이해를 위협합니다. 그리스도교 모더니스트들이란 이러한 신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신앙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 한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천주교는 1907년 교황회칙을 통해 모더니즘을 정죄하고 1910년에는 신자들에게 모더니즘을 반대하는 맹세를 의무적으로 하게끔 합니다. 개신교 쪽에서도 미국에서는 1910년과 1915년 사이에 「근본」(The Fundamentals-여기서 “근본주의”가 탄생)이라는 10여 권의 책자가 등장해 성서의 문자적 무오성을 주장합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논쟁과 결부된 성공회 인물이 있다면 바로 찰스 고어입니다.

원래 찰스 고어의 부모는 천주교를 “교황교”(popery)라고 경멸하는 저교회파(low church) 성공회 신자입니다. 행여 아들이 가톨릭 풍에 물들세라 고어가 열 살 되던 해에 천주교 신부였다가 개신교로 전향한 사람의 책을 선물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뜻과는 달리 고어는 이 책에서 고해나 금식, 유향 및 여러 가톨릭 풍의 신앙행위를 접하고 거기 매료됩니다. 훗날 고어는 “성사적 신앙이야말로 나를 위한 것”임을 그때 이미 감지했노라고 말합니다. 저교회 신앙을 물려주려 한 것이 거꾸로 고교회 신앙을 갖게 된 계기가 된 셈입니다. 아이를 부모 뜻대로 키우기란 역시 어렵습니다. 찰스 고어는 1878년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그리고 옥스퍼드 운동 주창자 중 마지막 인물이라 할 에드워드 보베리 퓨지가 1882년 사망하자 예리한 지성과 경건한 신심을 겸비한 고어는 앵글로 가톨릭 운동의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1883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의 퓨지 기념도서관 초대관장이 되면서 향후 1893년까지 10년 간 옥스퍼드에 머물면서 성공회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사도계승과 신경의 전통적 이해를 담은 책도 몇 권 써냅니다.

당시만 해도 앵글로 가톨릭 진영에서도 모더니즘을 신앙의 위협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기네 지도자인 찰스 고어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1889년 「세상의 빛」(룩스 문디 Lux Mundi)이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사상의 자유, 진화론, 성서비평을 옹호하는 글로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물의를 일으킨 글의 저자가 바로 찰스 고어였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별 게 아닐지 몰라도 당시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에게는 거의 배신에 가까운 충격으로 다가온 사건이었습니다. “성령과 영감”(The Holy Spirit and Inspiration)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글에서 고어는 성령께서 교회에 일하시는 네 가지 표징이 있으니 개인주의적이지 않은 것, 그러면서도 각자의 고유한 개인성을 길러준다는 것, 인간본성의 여러 차원 즉 신체적, 영적, 지적 차원을 다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기보다 점진적으로 작동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글 말미에 소위 성서영감설을 언급하면서 성서가 영감 받았다고 하는 것은 신앙의 토대 즉 하부구조라기보다는 상부구조에 해당한다고 씁니다. 그러므로 성서가 어떤 의미에서 영감 받았다고 하는가 하는 문제는 특정한 입장만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서 자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정도의 영감을 드러내는, 실로 다양한 문헌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감은 기록한 사람의 이해와 깨달음이 무엇이냐에 관한 것이지 기록 자체의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 등장한 성서비평은 영감 받은 저자가 의미하고자 했던 영적 진리를 찾는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저런 잡음이 걷히고 나니 이제 적어도 성공회 가톨릭주의자들과 모더니즘은 다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는 앵글로 가톨릭 진영에서 최고의 성서학자들이 나옵니다. 찰스 고어는 단순히 사상의 자유라는 가치에 헌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 자유로운 사상가로되 그가 내놓는 결론은 무척이나 정통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앵글로 가톨릭으로서 그는 성공회가 사도적 뿌리를 갖고 있는 교회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인습은 무조건 타파해야 한다는 식과는 거리가 먼 인물입니다. 다만 그의 정신적 시야가 현대의 새로운 것과 과거의 오랜 것을 다함께 조망하면서 통합하려고 할 뿐이며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에도 말이 되게 하려는 풍모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오늘날 마커스 보그는 이러한 맥을 잇는 신약학자로 보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젊어서는 급진적이더니 주교가 된 후에 변질된 것처럼 찰스 고어를 비꼬기도 했다지만 오히려 그의 사상과 신앙은 평생 한결 같았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고어는 1901년 워세스터 주교가 임명되자 교구를 분할하고 1905년 새로 탄생한 버밍햄 교구 초대 교구장을 합니다. 그리고 1911년에는 옥스퍼드의 주교가 됩니다. 1919년 은퇴한 이후에도 고어의 글쓰기는 계속됩니다. 이러한 여정 내내 고어가 이전에 쓴 것을 후에 부인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자유로울 것을 주창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년으로 갈수록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라 할 내용을 거듭 강조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가 전에는 급진적이다가 변절한 반동이기라도 한 듯 달라지기도 합니다만 사실 그는 새로운 사상과 조류를 피하지 말되 전통적 신앙의 핵심을 재해석하고 서술하려는 중심에서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고어의 그러한 풍모야말로 성공회 통합성 체질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례로 당대의 지식인들은 자연을 폐쇄적인 체계로 이해하면서 기적의 가능성을 아예 부정했습니다. 성서저자들이 과학을 몰라서 원시적으로 이해한 것이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어는 보기에 이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세계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짓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기적입니다. 고어는 모더니즘이 등장할 당시의 양극성, 즉 한쪽은 과학의 이름으로 모든 초자연을 부정하고 다른 한쪽은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과학을 부정하고 있을 때 이 양극성과 환원주의적 입장을 넘어서고 합일해 냅니다. 성공회 영성을 “포괄성”이라고 종종 말하거니와 그 내용은 어중간함이 아니라 대극의 합일을 이뤄내는 힘에서 보아야 합니다. 찰스 고어는 그러한 성공회풍을 스스로에게 구현해 낸 개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찰스 고어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역사적 신앙의 핵심들을 자유로운 사고와 과학, 역사적 검증을 거친 후에도 “확고하고 손상되지 않은 채” 말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가 자랑스럽게 여긴 사도계승의 교회 성공회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사도들의 교회와 한 마음인지를 찾아내고 싶어 했습니다. 고어는 사회정의도 열심히 대변하였는데 역사적 신앙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피할 수 없는 결론으로 보았습니다. 역사적 신경에 표현되어 있는 사도들의 신앙을 성공회가 견지하려 할 때 모더니즘과 성서비평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통한 재해석과 의미 확보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고어의 신학적 입장이 성공회에서 일각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평범한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세기 전 그가 일으킨 충격과 반향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어를 읽으면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하고 갈대처럼 흔들리는 우리 처지를 떠올립니다. 급진적 사고와 역사적 신앙이 둘이 아닌 풍모를 한국의 성공회는 마련할 수 없을까요? (이주엽 신부)

"그가 자신의 존재로 피어나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의미에서 작은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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