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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기뻐하라 온 천하만민아, 임마누엘이 오시리도다!

by 분당교회 2021. 12. 18.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7000명이 넘으면서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입니다. 단톡방에 올려드렸듯이, 위드-코로나로 가기 위한 과도기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 시기에 해야 할 최선은 의료진들과 방역 당국의 안내에 따라 3차 접종을 하는 것, 그리고 소아 청소년들의 접종을 독려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전문가들의 안내를 신뢰하며 이 시기를 잘 헤쳐 가기를 기도합니다. 

 

제대 앞 대림초 3개에 불을 밝혔습니다. 대림 3주일입니다. 대림3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장미주일은 1년에 두 번, 사순절 중간인 사순4주일에, 그리고 대림절 중간인 대림3주일에 지킵니다. 

 

대성당 같은 곳을 보면, 장미주일에는 전례 색깔도 화려하고 고운 붉은 장미꽃 색을 사용합니다. 장미는 그 화려한 색깔과 짙은 향기로 기쁨을 상징합니다. 참회와 절제의 절기 중간에 이러한 화려한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주일이 있는 이유는 그 만큼 사순절과 대림절 기간에 기도와 극기 등의 경건 생활이 엄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잠시 휴식의 시간을 주려했던 것이지요. 

 

경건생활이 너무 느슨해진 현대교회이기에 장미주일의 의미가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대림절기 동안 여러 교우들이 매일기도를 함께 하고 계십니다. 

 

화요일 목요일에는 아침 6시30분에, 수요일에는 저녁 8시30분에, 그리고 금요일에는 오전 10시에 기도회를 갖고 있는데, 금요일은 오전 시간이라 고정 멤버 8분이 함께 기도하고 계시구요. 화수목에는 10분 이상이 참여하고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특별히 토요일에는 또래모임들이 성당청소를 하고 생활나눔과 기도회를 갖고 있는데요 두 주 전 1남성모임은 무려 7분이 참석하셨고, 지난 주 2남성은 3분, 어제 청년회는 5명이 함께 해서 기뻤습니다. 

 

코로나로 성도간의 친교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함께 봉사하고 근황을 나누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요. 

 

서울교구 표어가 “친교의 신앙으로 선교하는 제자공동체!”입니다. 여기서 친교라는말이 교회의 본질이 되는 코이노니아를 번역한 말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새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코로나로 대면이 어렵지만, 줌이나 구글 미트로, 전화나 카톡으로, 서로 안부를 나누고 기억하며 중보하는 사랑의 교제가 더 활성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오늘부터 교회학교가 온라인예배를 시작하는데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읽은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읽은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요한의 외침을 들었습니다.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요한의 세례는 하느님 나라 백성답게 살지 않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음을 인정하고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공적으로 드러내는 의식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회개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회개는 행실로 확증되는 것입니다. 행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11절부터 나옵니다.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회개한 신자의 삶이 확인되는 영역이 성전, 교회가 아니라 일상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12절부터는 당시 유다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던 세리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세리는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군인데, 로마제국이 부과한 통행세 관세 조세나 부과금 등을 거두어들이는 사람들로 동족들에게 부당한 세금을 부과하고 중간에 착취하는 경우가 많아 동족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군인은 당시 팔레스타인에 로마 군단이 없었기 때문에 직업 군인이라기보다는 세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지닌 경찰병력이거나 헤로데 안티파스의 군병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식민지 제국에 협력하는 그런 직업들을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를 이용해, 직권 남용이하고 하죠?, 부당이익을 취하거나 자기들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자기 잇속을 차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직함과 감사와 자족의 삶이 세례 받는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이어야 함을 제시합니다. 

 

뉴스를 들어보니까 용산세무서장을 지낸 윤우진이라는 사람이 자리를 이용해 뇌물과 골프 접대 등을 받아서 경찰이 여러 차례 영장을 청구했는데 검사인 동생의 입김이었는지 구속되지 않다가 이제 서야 구속 되었다군요. 

 

전에 섬기던 교회 신자회장님이 정형외과 보철기구 회사 사장이었는데 병원에 가서 영업을 하면, 결정권이 있는 자리에 있는 의사가 RV차 같은 걸 커미션으로 요구한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 사람이 유명한 교회 성가대장으로 봉사하는 안수집사여서 괴로워했던 모습이 기억이 납니다. 

 

정도의 차리는 있지만, 우리 사회에는 자리를 이용해 자기 잇속을 차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살아 있다면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호되게 꾸짖었을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사탄의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짓을 하는 자들이 교회에 다닌다고?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있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탄적인 가치와 문화가 팽배한 세상 속에서, 일상 가운데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일상의 삶에서 보여지는 행실이 회개한 하느님 나라 백성임을 확증하는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에 예수님의 비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이야기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며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인데, 즉 재림의 때에 심판이 있는데, 그 때 심판의 기준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자기 오른편에 앉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냐”고 물으니까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고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죄악 가득한 세상 속에 살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이 회개한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이고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떳떳하게 서서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는 믿음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일상 가운데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래서 교회는 대림신앙이 중요합니다. 대림절은 구원의 신비 안에서 종말론적인 신앙을 회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구원의 역사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과 마지막 날 구세주이며 심판자로 다시 재림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할 ‘아직’ 사이에서 순례의 길을 걸어가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초림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십자가에 오르신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하시고자 하느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신 그 사랑! 이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 사랑을 오늘 1독서는 이렇게 전해 줍니다. 스바니야 3:16-17, “16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마라. 기운을 내어라.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이 말씀을 노래로 만든 찬양을 부르면서 서로를 축복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봅시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 하시리라” (서로 축복하며 찬양)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시간이 감사성찬예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가 생명입니다. 

 

예배를 생명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일상 가운데 기도를 우선순위에 둡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영적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달리 번역해보면, ‘하느님께서는 진실하게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고 하느님께서 그 은총을 주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2독서 필립 2장 7절을 보십시오.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바로 이 상태가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입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많은 박해와 고난 가운데 살아간 사도 바울로는 예배와 기도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를 누리는 경험을 했기에 6절 말씀을 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사도 바울로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경험하는 것이기에 동일한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거듭 권고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기쁨과 너그러움입니다. 

 

오늘 2독서, 필립 4:4-5, “4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사도 바울로의 간증입니다. 여러분의 간증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하고 기도하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기쁨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쁨 가운데 너그럽게 환대하고 나누고 섬기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교회위원회를 하며 ‘성탄절기헌금을 어디에 나눌까?’ ‘노숙인 무료급식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섬길 수 있을까’ 대화할 때 제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작고 가난한 교회이지만, 더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임에 감사했습니다. 이 기쁨과 감사가 우리 교회를 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은 대림절기 두 주간 동안 예배와 기도에 우선순위를 두고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늘의 평화로 충만해져서 어디에 가시든지 하느님 나라를 전염시키는 해피 바이러스가 되고, 너그럽게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실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는 요한의 선포 앞에 “일상 가운데 나누고 섬기는 환대의 삶”으로 응답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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