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작은 이를 환대하는 주님의 마음으로

by 분당교회 2021. 2. 14.

2021년 2월 14일 설교 말씀

마르 1장 40절 ~ 45절

김장환 엘리야 신부

 

내일부터 방역단계가 2단계로 조정되어, 다음 주일부터는 예배에 참석하시는 지역을 조정합니다. 21일에는 분당, 서울, 성남 지역 교우들이 참석하시고 28일에는 용인, 판교, 광주, 기타 지역 교우들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국민들의 협조와 방역 당국 의료진들의 수고에 거듭 감사를 드리며 그들을 위해 중보 드립니다.

 

설 명절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설에 나누는 덕담에 관련된 좋은 시가 있어 읽어드립니다. 박노해 시인의 ‘어머니의 새해 강령’이라는 시입니다. 

 

설날이 오면 어머니는

어린 우리 형제자매를

장작불에 데운 물로 목욕을 시킨 후

문기둥에 세워놓고 키 금을 새기면서

작년보다 한 뼘이나 더 커진 키를 보며

봐라, 많이도 자랐구나

어서어서 자라나거라

함박꽃처럼 웃으며 기뻐하셨다

 

설날이 오면 어머니는 

어린 우리 형제자매를

깨끗이 빨아 다린 설빔으로 갈아입힌 후

둥근 상에 앉혀놓고 떡국을 먹이며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서 모아낸

저축통장을 펴 보이며 봐라

우리 집 희망통장이 많이 늘었단다

올해도 열심히 공부해 진학하거라 

햇살처럼 웃으며 기뻐하셨다

 

설날이 오면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형제자매에게

키가 얼마나 더 자랐는지 키 금을 재지도 않고

돈을 얼마나 더 모았는지 통장을 펴보지도 않으시네

올 설날 아침에도 둥근 상에 모여 앉아

떡국을 나누어 먹이시며

올해도 많이 웃고 건강하거라

욕심내지 말고 우애를 키우며 겸손하거라

옆도 보고 뒤도 보며 화목하거라

또 한 해를 살아갈 새해 강령을 선포하시네

 

올해도 많이 웃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욕심내지 말고 우애를 키우며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옆도 보고 뒤도 보며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나눈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를’의 3장 핵심 질문을 살펴봅니다.

 

1. 18세기 유럽 (이 사상)은 삶에서 신비의 영역을 제거하려 했으며 모든 종교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무엇인가요? 계몽주의

 

2. 계몽주의가 이성만을 강조한다면 (이 사상)은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무슨 사상입니까? 경건주의! 계몽주의나 경건주의나 둘 다 세례 행위와 의미를 순전히 인간 편에서만 다룬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3.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셔서 이 땅에 속한 요소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시며 거룩한 복의 그림자를 육체 속에서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서 (이것)을 전해주십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것들! 

 

4. 제자를 삼을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 

 

5. 그리스도교는 ‘자기 일은 스스로’ 하게 하는 종교가 아니며 구원을 빨리 얻는 법을 가르쳐 주는 학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언제나 무엇일까요? 선물

 

그럼 오늘의 말씀을 나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달라지는 생활 중에 대표적인 것은 예배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자녀로 삼아주신 구원의 감격하여 하느님께 감사와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주일감사성찬예배가 기다려집니다. 매일 기도와 묵상으로 일상의 개인예배를 드리며 주님과 사귀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축복을 맛보고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배자로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점차, 인격이 변화합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와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고 반복되는 행동은 습관이 됩니다. 거룩한 습관은 인격의 변화로 나타나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존귀하고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간증이 풍성한 우리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권면합니다. 필립 2: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게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배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하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선생님은 하고자만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나병은 접촉하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질병이어서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살 수 밖에 없는 천형과도 같은 질병이었습니다. 그런 나병환자가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이 나병환자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41절에 나와 있는데, 깊이 묵상해 보면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41절에서 가장 주목하게 보는 표현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예수님이 지니신 측은지심입니다. 원어로 ‘스프랑크니조마이’로 ‘창자가 끊어지듯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에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과 같은 표현입니다. 이 마음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로마는 이 마음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였습니다. 그리스나 로마나 모두 노예들의 노동에 의해서 유지되는 계급 사회였습니다. 그리스에서 철학이 발달한 이유가 노예 노동입니다. 모든 기반 노동을 노예들이 하니까, 시민들은 아고라 광장에 모여 철학적 주제들을 토론하면서 발전했던 것이죠. 반면 로마 시민들은 노예들이 시중드는 가운데 파티를 즐겼습니다. 연이은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그 전 파티에서 먹은 것을 토하기까지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들을 시중드는 노예가 다치거나 병들었을 때 연민의 마음을 갖게 된다면 자신들이 누리는 사회 질서가 유지되기 힘들어 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인들은 동정과 연민의 마음을 천박하고 저급한 감정이라는 여기고 냉정함 무관심의 정서 Apathy를 찬양하며 최고의 가치고 여겼습니다. 그리스철학에 따르면 최고의 신은 무격정, 무각감한 Apathy한 신입니다. 이런 신은 당시 계급 질서를 유지시켜 주는 이데올로기 였던 것입니다. 

 

장시간 노동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자본은 막대한 이윤을 취하고 있는 코로나19 시대 대한민국도 그리스-로마 시대와 같은 계급사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Apathy가 최고의 가치이고 Apathy한 신이 최고의 신이 되는 계급 사회에서 예수님이 측은지심을 가지셨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원초적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고 대안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하게 만드는 죄인이기에 나병환자가 나타나면 돌을 던지면서 일정 거리 안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병환자로 사람이 나타나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소리를 지릅니다. 

측은지심을 가지신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피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손을 뻗어 그에게 갖다 대십니다. 이것이 환대입니다. 나병환자는 얼마나 감격하고 감동했을까요? 손을 갖다 되셨다는 것은 나병환자의 부정을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대속자의 행동입니다. 기독교는 대신하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부정한 나병환자를 접촉하면 부정해지니 배제하고 구별하는 것이 당시의 율법이었다면, 예수님의 품으신 측은지심의 사랑은 환대의 빛으로 흘러 나가 나병환자를 정결케 하는 치유의 능력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감사성찬예배는 이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정화의 시간이며 회복의 시간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을 지닌 예수님은 당시 사회적 약자 중에 하나였던 어린이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르 10:13-14,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이제부터 ‘기억하라 네가 누구인지’ 4장의 내용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아세례를 베풉니다. 아이들을 세례대 앞으로 데려올 때 아이의 부모는 그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선 것입니다. 애초에 그 아이는 주님의 자녀라고 교회를 통해 부모들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작아서 주님께 더욱 총애 받는 아이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고, 아이가 받아 마땅한 환대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작은 아이도 자신의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교회는 ‘작은 이’를 향한 그리스도의 관심을 이어가라는 명령을 받은 가족이며, ‘작은 이’를 중심으로 데리고 와 그들에게 가장 영예로운 자리를 내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무력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어린 아이, 노인, 소외된 이 등 ‘작은 이’들이 당신의 나라에 거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18:5,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요즘 많은 부모들은 자녀에게 종교적 가치를 ‘주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모들은 교육이 가치 있다고 확신하기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예술이 삶을 풍요롭게 함을 확신하기에 피아노를 배우게 하며, 어른으로서 행복하게 살려면 기본적인 일을 할 줄 알아야 하기에 집안일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유독 신앙에 관해서는 그러한 확신을 갖지 못합니다. 신앙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이 믿는 바는 이렇단다. 우리는 너에게 이 믿음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했어. 너도 여기에 참여했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하는 것과 “종교 문제는 네 소관이야. 우리는 네게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유산을 전해주거나 경험을 나누거나 전망을 이야기하지는 않을게”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데 말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단할 자유가 있지만, 부모의 품 안에 있는 동안에는 신앙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아이가 부모의 그 모습에서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자녀에게 신뢰를 쌓아야만 그 아이는 자라나서 부모를 떠나 믿음으로 홀로 서는 인격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부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우리 안에는 작은이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환대하는 주님의 마음, 측은지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만이 아니라, 죄인 창녀 세리 등 당시 소외되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을 환대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은 최근, 측은지심으로 손을 뻗어 고통 중에 있는 이를 섬기셨던 경험이 있으신지요?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예리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6장 21절,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예배와 기도, 묵상으로 주님의 측은지심을 품는 사람들은 온전한 십일조와 선교구제헌금으로 어린 아이로 대표되는 ‘작은 이’들에게 자신의 손을 펼칩니다.

 

그래서 예배공동체인 우리교회는 올 해도 계속 ‘작은 이’들에게 손을 펼칩니다. 

공인현 선교사님을 통해서 케냐의 에이즈 미혼모들과 마사이 족에게 손을 펼칩니다. 

너무나 연약한 부산교구와 제주교회에 손을 펼칩니다. 

나눔의 집을 통해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손을 펼칩니다. 

기도와 봉사의 삶에 자신을 투신하신 수녀원과 수도원에 손을 펼칩니다. 

월세와 관리비, 대출 이자와 원금을 감당해 가는 상가월세 교회인 우리 성공회 분당교회에도 손을 펼칩니다.

더 많은 ‘작은 이’들에게 손을 펼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 모두 예배자로 살아 주님의 마음, 측은지심을 키워 가시는 2021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손을 갖다 대시며 ‘그렇게 해주겠다. 깨끗하게 되어라.’” 잠시 침묵하며 이 말씀을 묵상합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