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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

by 분당교회 2020. 6. 28.

2020년 6월 28일 연중 13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10:40-42

 

 

어느덧 6월의 마지막 주일이네요. 지난 주 목요일 6.25 기념식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선조들, 우리나라 자유를 위해 먼 이국땅에서 죽은 많은 UN군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감사드렸습니다. 파국으로 치닫던 남북관계도 일단은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하구요. 

 

주보 2면에 있는 글을 읽어드립니다. 

 

지난 수요일, 감사 카드를 받았습니다. 실버타운에 사시는 교우님이 보내신 건데, 글의 일부를 읽어드립니다. ”... 저와 저의 여식은 주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로서 이번 성취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결정은 야훼께서 하신다’는 잠언 16장 1-2절을 말씀을 되새기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녹록치 않은 인생 여정에서 그 고비 고비마다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통함에도 감사하지만, 고난 중에서도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를 선포합니다. 

 

다음 주일, 7월 5일에 분당교회가 지키지 않던 절기,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 지난 6개월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고백함으로, 우리의 삶이 믿음의 반석 위에 더 굳건하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주보 3면 광고 7번에, 맥추감사주일 안내가 있습니다. “따로 절기헌금을 드리지 않고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편지를 봉헌합니다. 예배 중에 감사편지를 낭독할 교우(1부, 2부 각 2명) 자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최근 거의 모든 기독교 교단과 단체들이 코로나-19 이후의 기독교 전망에 관한 포럼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성공회만 해도 브랜든선교연구소와 교무원에서 진행했었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래서 요즘 신조어 W.C.(B.C/A.C)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성급하게 A.C를 논하고 있음은 기독교 내부의 걱정이 그 만큼 크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이후 기독교를 전망하면서, 복음의 공공성을 강조합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섬기는 교회가 살아남는다.’는 말이죠. 당연한 처방입니다. 

 

기독교 초기,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다 피신을 하는데도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들 곁으로 가서 그들을 간호해 주었고, 그로 인해 기독교가 더 부흥했다는 것이 교회사가들의 평가입니다. 이런 사랑의 능력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제가 아는 장로교 통합 측 목사님이 이런 처방을 내놓는 포럼에 대해 이렇게 비판을 했더군요. 

 “종교의 핵심은 제의와 신체험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부가적인 요소이다. 일단    섬김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그 섬김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제의와 연결되는     지 경험되지 않고, 섬김을 통해 신체험으로 이끌어주지 못하면 섬김은 그저 진    빠지는 자기만족에 불과하게 된다. 종국엔 그 진이 다 빠져버린다.” 

 

저도 일정정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의란 ‘예배’를 말하는 것이고, 신체험이란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면, 그 인생은 변화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섬김의 능력이 여기에서 온 것이죠.

 

비아출판사에서 발간한 “우리 아버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동방정교회 알렉산더 수메만 신부가 쓴 책인데, 문고판이지만 그 내용은 깊고 풍부합니다. 여러분에게 여름 필독서로 권해드립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 그분을 아는 것, 그분을 향한 사랑, 그분과 친교를 맺고 그분을 영원히 기뻐하는 것이 우리가 생명을 받은 이유,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P55). 

 

이것이 오늘 2독서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의 내용이죠. 로마 6:23,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불로장생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실 겁니다. 영생은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과 화해하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신적인 성품과 능력을 공급받는 생명의 삶입니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을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슈메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유혹 중에 가장 강력한 유혹은 이 세계에서, 우리 삶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하게 하는 유혹입니다”(P80).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거룩의 체험’, ‘깊은 깨달음’, ‘하느님의 임재 경험’ 등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유혹은 강렬하기만 합니다. 

 

하느님을 경험하면, 초대교회 신자들이 보여줬던 죽음의 세력을 거스르는 섬김의 삶과 같은 생명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1독서가 그 길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1독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관한 많은 설교를 들어오셨을 텐데,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하느님도 그렇고, 100세 얻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제가 기도하는데 ‘네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들었다면, “사탄아 물러가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느님을 새롭게 경험하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이름이 하나 더 알려졌습니다. “야훼 이레”, “예비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나의 공급자이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느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됩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경험하면서 알게 된 하느님의 이름들이 많이 나옵니다.

출애 15:26, “야훼,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의사이다.” 야훼 라파라고 합니다. 

 

출애 17:15, “모세는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야훼 니씨라고 이름을 붙이고”, ‘하느님은 나의 깃발이시다.’라는 뜻입니다.  

 

레위기 20:8, “너희를 거룩하게 해주는 이는 나 야훼이다.” 야훼 므카디쉬라고 합니다(하느님은 나의 거룩함이시다).

 

판관기 6:24, “기드온은 거기에서 야훼께 제단을 쌓아 바치고는 그 제단을 ‘안심시켜 주시는 야훼’라 이름지어 불렀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개역) ‘하느님은 나의 평화이시다.’

 

시편 23:1, “야훼는 나의 목자”, 야훼 로이 - 하느님께서 나의 목자이시다.

 

예레미야 23:6, “'야훼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리라.”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개역) 야훼 치드케누 - 하느님은 나의 의義이시다.

 

에제키엘 48:35, “이 도읍지의 이름은 이제부터 야훼 삼마이다."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존재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들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성품과 특성을 알려줍니다. 이 이름을 믿고 의지할 때, 그 이름대로 행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느님을 경험하여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을 더 갈망하게 되며 새로운 차원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흑사병에 걸린 환자들 곁으로 가는 삶을 산 것과 같은 환대의 영성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 이 보잘것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그 상이란 오늘 복음 40절,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는 예수님 말씀 대로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라는 표현이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이야기에 그대로 나옵니다. 40,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동일시하시는 보잘 것 없는 이들 환대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삶을 삽니다. 

 

얼마 전, 외국인 근로자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월급도 체불하고는 본국으로 추방시켰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분노가 치밀더군요. 우리나라 원양어선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외국인 노동자인데, 우리나라가 가장 나쁜 환경에서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적게 월급을 주는 나라라고 합니다. 치욕스러웠습니다. 

 

안타깝게도, 국회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별금지법’ 조차도 한국기독교 눈치를 보며 제정되지 못하는 현실이니, ‘환대’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한국기독교 내에서 아직까지도 낯선 단어일 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그 분을 알아가며 그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감사성찬예배를 중심으로, 일상에서 묵상과 기도로 예배드릴 때, 성령님은 나와 우리 공동체에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그것에 순종하면, 그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은총과 영광을 알기에 낯선 이로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환대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을 경험하는 믿음으로, 환대의 삶을 살아, 영원한 생명, 그 풍성한 은총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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