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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령충만함으로 삼위일체 신앙의 신비를 누리라!

by 푸드라이터 2020. 6. 7.

2020년 6월 7일 성삼위일체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마태 28:16-29

 

벌써 6월 첫 주일입니다. 어제는 6월 첫 토요일 아침예배가 계획되어 있었지만, 소모임 등을 통해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고 있어 예배를 취소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주중 모임과 활동을 계속 자제하고,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지키는 가운데 주일예배를 드려달라는 주교님의 여덟 번째 사목서신도 나왔습니다. 

 

방역 당국과 공무원, 의료진들의 수고 덕분에 이렇게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성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교우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정의 없이 평화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백인 경찰 4명이 흑인인 조지 플로이드를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눌러 질식사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외침에도,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가 3분 가까이 진행됐음에도, 계속 목을 눌러 숨지게 했습니다. 이에 미국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유색인종차별문제가 전면으로 드러나며 시위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안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는, 시위대를 고무총으로 해산시키면서 건너편 세인트존스 교회로 가서 성경을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미국성공회가 크게 반발했습니다. 세인드 존스 성당이 성공회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워싱턴DC 교구의 매리 앤 버디 주교는 이날 관할 내 세인트존스 교회에 트럼프 대통령이 방문한 것에 "나는 분노한다."고 정면 비판하며 "우리는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서 정의를 찾으려는 이들과 연대하고 있다. 우리가 대통령의 선동적인 언어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세상이 알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최초로 미국 성공회 주교에 오른 마이클 커리 대주교도 비판에 가세했습니다. 그는 이날 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이 "교회 건물과 성경을 편파적 목적으로 이용했다"고 지적하고 "이 나라가 깊은 상처와 고통을 겪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의 행동은 우리를 돕거나 치유하는 데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성공회 플로리다 중부 교구의 그레그 브루어 주교는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미 대통령이 세인트존스 교회에서 성경을 들고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라파예트 공원의 시위대가 최루탄을 맞고 해산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며 "이것은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신성모독"이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습니다.

 

전 켄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주교도 트럼프의 ‘교회 앞 성서 쇼’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이 6.10항쟁 33주년 기념일입니다. 1987년 6월 10일, 재야인사들이 성공회 주교좌성당에 모여 민주화를 촉구하면서 시위가 확산되었고, 마침내 6.29일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며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진일보했습니다. 

 

성공회주교좌성당 마당에는 ‘6.10항쟁 발원지’라는 기념 표지판이 있습니다. 성공회 신자들의 마음에도 긍지로 새겨져서, 성공회가 정의를 향한 평화의 발걸음에 앞장서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현재 미국과 홍콩에서 진행되고 있는 정의를 향한 평화적 시위를 지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정의 없이 평화 없다. Black Lives Matters!”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삼위일체란 말 그대로 ‘삼위 - 세 인격이, 일체 –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근거로 기독교의 교리로 확정되었고 아타나시오 부제가 최종 정리했습니다. 주보 2면에 있습니다. 15-16번을 보면, “성부께서 하느님이듯 성자께서도 하느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느님이시나이다. 그러나 하느님 세 분이 아니라 하느님 한 분이시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는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 세 인격이 완전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계신다는 기독교의 신앙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하느님 이해였습니다. 

 

다신교를 숭배하는 여러 나라들 사이에서 유일신 야훼 하느님을 믿는 유대교 출신들인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에게 “주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성령님을 경험하면서 성령이 성부 하느님도 아니고 성자 예수님도 아니지만, 하느님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과 성령님을 경험하면서 성부의 신성은 물론이고 성자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을 믿었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독특한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타종교화 구별하고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삼위일체 신앙이 전반적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마태 28:19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위가 다 등장합니다. 

 

오늘 서신 2고린토 13장 13절에도 삼위 하느님이 함께 나와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이렇듯 초대교회 신자들은 삼위일체 신앙이 교리로 정리되기 전, 하느님께서 모든 활동을 삼위로 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봐도 삼위의 활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1독서 말씀입니다. 창세 1: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 성부 하느님이십니다. 

1: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하느님의 기운은 루아흐, 성령을 말합니다. 1: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에서 ‘빛이 있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 1: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창세기 11장 3절의 말씀이 곧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삼위일체를 살펴보았지만, 삼위일체라는 하느님의 존재의 신비를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성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어거스틴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해 15권이나 썼음에도, 하느님에 관해서는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모든 활동이 삼위 하느님이 함께 일하시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오늘 복음처럼, 그리스도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세례도 삼위의 이름으로 베풉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도 그렇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수기도도 역시 삼위하느님의 활동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하느님의 어린양이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예수 – 주, 그리스도, 하느님 아들 = 성자 하느님 / 하느님 – 성부 /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1고린토 12장 3절의 말씀대로 예수기도는 성령의 활동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인 성공회 신자들은 어떤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십자성호를 그으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삼성경이라고 하는데, 삼위일체 신앙의 가장 단순한 기도일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삼위일체 하느님을 묵상하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이 ‘나의 존재됨(정체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는 가장 근본적인 진리임을 새삼 느꼈습니다.

 

하느님은 창세전부터 삼위가 서로를 사랑하며 교제하셨기에 완전하십니다. 스스로 충분했기에 사랑하고 교제하기 위해서 창조할 필요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느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닮은 사람을 만들자!” 

 

목적은 단 하나,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나눌 인격적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시면서 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 인격적인 사랑을 다시 나누고자! 이렇게 나는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스바니야 3장 17절을 개역개정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도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느님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마태 22: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삼위의 사랑 속으로 참여하는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C.S.Lewis는 삼위일체 신앙을 논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삼위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으로 온전한 일치를 이루십니다. 여기서 일치란 정태적 개념이 아닌 사랑으로 ‘하나를 이룬다’는 동태적 개념입니다. 최근에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활동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역동적인 사랑으로 나타내며, 삼위가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하느님처럼 공동체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혼 밥, 혼 술로 상징되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이지만, 인간 내면에는 깊은 고독과 외로움이 있어,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환대해주는 공동체를 갈망합니다.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가족이라고 표현합니다. 에페 2:19,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 되게 하시고자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습니다. 에페 2: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고 ‘서로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살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한 지체께서 메론을 가져 오셔서 예배 후 맛있게 나누어 먹었는데요 ‘너무 맛있어서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쉬고 있지만, 금요성경공부 때 보면, 집에서 맛깔난 반찬들을 싸가지고 오십니다. 어떤 분은 간식거리를 가져오시고, 과일도 가져오십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같이 살며 밥을 같이 먹는 식구입니다. 대면 접촉이 어려운 코로나-19이지만, 가족은 이렇게 지냅니다. 성공회분당교회 식구들은 서로 서로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서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으신지요? 맛있는 것 있으면 같이 먹고 싶고 그러신지요? 그러면 가족입니다.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공동체를 살아간다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해도, 삼위 하느님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 살고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 공동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며 제안합니다.  6월 안으로 지체 한 명 이상 개인적으로 만나 밥을 먹읍시다. 한 주에 적어도 한 명 이상 통화하면서 수다 떨어봅시다. 그리고 매일 적어도 또래 모임 지체들을 위해 중보기도합시다. 

 

그런데 생각처럼 공동체로 서로 사랑을 살아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 충만을 명령합니다. 에페 5:18, 술 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 하면 성령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득차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성령께서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이제 오늘 2독서 마지막 구절로 설교를 마칩니다. 성공회 성무일과 조도 만도를 끝내는 축복기도문으로 사용되는 말씀입니다.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친교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코이노니아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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