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평화의 사도 공동체

by 분당교회 2019. 10. 13.

2019년 10월 13일, 연중 28주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설교 말씀

 

평화의 사도 공동체

 

우리 교회는 새 가족이 많습니다. 현재 주일 예배에 참석하시는 교우들을 보면, 제가 부임하기 전 교우들과 그 이후에 오신 분들이 반반입니다. 새 교우들의 정착과 교우들 간의 교제와 일치가 현재 우리교회 당면 과제입니다. 이를 위해 지난 주 토-일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토요일 자정까지 있다가 돌아왔는데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후원해 주신 교우들, 준비하시고 섬겨주신 젊은 아버지들, 특히 윤지상(요한) 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참여하셨던 분들 중에 한 두 분 정도 소감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죄송스러운 것은 어르신들을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고 섬겼어야 했는데, 황영숙(요안나) 교우님이 버스에서 내리시다 넘어지셔서 발등에 가는 금이 가 깁스를 하시게 된 일입니다. 속히 완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런데 지난 주 월요일 저희가 방문했던 우리마을 콩나물공장이 화재로 전소되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었습니다. 장애우들의 일터인데 하느님도 참 무심하십니다. 약 15억 정도의 손실이 발생했는데 보험금은 7억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선배 신부님이 걱정되어 김성수 주교님께 전화 드렸더니 “하느님이 계신데 뭐 걱정이냐? 넌 잘 지내고 있지?”하시더랍니다. 이미 개인적으로도 성금을 보내는 교우들도 계십니다. 교회적으로는 11월 첫 주일 추수감사주일 절기 봉헌금을 플로윙하려고 합니다.

 

이제 2019년도 한 달 보름 남았습니다. 교회력으로는 11월이 끝이니까요. 12월 첫 주일 대림수주일로 새로운 해를 시작합니다. 2019년 한 해를 멋지게 마무리하고자 좋은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주보 3면 오른쪽 하단에 광고가 나와 있는 침묵기도학교입니다. 침묵의 영성, 렉시오 디비나, 예수기도, 향심기도, 복음관상기도, 의식성찰기도 등을 통해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관상기도를 배우고 훈련하는 시간입니다. 5주 과정으로, 10월 30일 수요일 오후 8시에 개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존재”입니다. 여기서 기도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하느님과 교제하는 기도가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는 공부, 기도 없는 사역, 기도 없는 노동은 자기왕국을 건설해 가는 욕망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공부하며 일하는 성공회분당교회가 되고자 기도학교를 개설하는 것입니다. 2019년 마지막 5주간의 수요일 저녁을 비우시고 침묵기도학교에 참석하시기를 권고합니다. 아멘?

 

이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일행이 나병환자 열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 나병은 전염성이 있기에 일정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이 외마디 외침에 병 고침을 받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의 예수기도는 이 기도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성찬예배 중에 드리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같습니다. 침묵기도학교에 참여하시면 더 깊은 내용을 배우며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외치는데도, 예수님은 치유를 위한 선포도 그 어떤 행동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에는 피부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것을 사제에게 가서 확인받고 공동체로 복귀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몸은 치유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몸으로 무조건 사제에게 간다? 우리 같으면 선뜻 발걸음을 띠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럼에도 열 명의 나병환자는 사제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아니고는 발걸음을 옮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따라 행하는 단순한 믿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중에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대목 때문에 오늘 복음은 추수감사주일예배 본문으로 자주 채택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돌아와 감사드린 사람으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고 있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루가복음 10장에도 사마리아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내용이었죠? 누가 내 이웃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을 받고 예수님이 들려주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반쯤은 죽게 되었습니다. 율법학자, 레위인은 그들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치료해 줍니다. 자기 말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보살펴 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환자를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이 어떤 존재인지 우리에게는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진짜 꼴도 보기 싫은 사람, 상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로 그런 사람이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포비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대상을 공포스러워 하며 회피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유독 한국기독교 안에 포비아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슬람 포비아, 종북 포비아, 게이 포비아로 대표되는 동성애자 포비아 등등. 포비아는 차별을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 견고한 벽을 쌓고 분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치유 사건을 통해,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포비아하며 차별하는 유대인들의 사고를 깨뜨리십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있는 견고한 벽을 허물어뜨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이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에페 2: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하느님의 사랑은 제한이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다함없는 사랑은 먼저는 소외당하고 업신여김 받으며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에게 향하여, 마침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포비아를 거부하고 허물어뜨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 벽들이 존재하는지요? 젠더 간, 세대 간, 이념 간, 지역 간, 계층 간, 심지어 조국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까지... 이런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소외된 사람, 약한 사람을 보듬으며 차별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생각과 시각의 차이가 있지만, 서로 존중하며 함께 예배드리는 신비의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성공회는 성공회대학교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좌파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 안에는 광화문에 나가시는 분도 있고 서초동에 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복음은 좌파고 우파도 다 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한계와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만 구원받으면 되는 복음이 아니라 모든 대립과 경계선을 넘어 모두를 하나 되게 하는 복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무식한 어부들도 있었고, 세리나 창기와 같은 죄인들도 있었으며, 열심당원과 자객 같은 급진 좌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공평과 정의, 생명과 평화도 부족하고 사랑과 긍휼, 용서와 화해도 부족한 이 시대에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초대교회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 교회가 바로 그 복음의 능력이 넘쳐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차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평화를 일구어 가는 평화의 사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매일 아침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는 사랑을, 

 모욕이 있는 곳에는 용서를, 

 불화가 있는 곳에는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는 믿음을 보이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는 희망을, 

 어둠 있는 곳에는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는 기쁨을 보이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신을 온전히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이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