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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이 기뻐하시는 회개!

by 분당교회 2019. 9. 22.

2019년 9월 22일 설교 말씀

루가 15:1-10

김장환 엘리야 사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 식구라고 합니다. 가족의 개념입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 전화하면 인사말이 ‘만나서 밥 먹자’입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밥상에서 우정이 깊어집니다. 그래서 밥상의 교제가 중요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성공회 공적인 예배인 감사성찬예배는 애찬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애찬을 준비하시는 분들 또한 성찬을 집례하는 사제와 동일하게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시는 겁니다. 오늘은 또래모임으로 애찬이 없지만, 거듭 애찬을 위해 수고하시는 교우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악한 사람과는 접촉하지도 말고, 율법을 제시하지도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들이란, 장애인, 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 세리, 문둥병자 등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사람들을 차별하고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배제시켰습니다. 그래서 kosher라는 음식법으로 이런 사람들과는 밥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사실 당시 죄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은 악인이 아닌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 싫어했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늘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루가 7장 34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개역개정)

 

오늘 복음에도 예수님은 이들과 함께 밥을 먹습니다. 루가 15: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그 주변에서 그런 예수를 바라보며  비판만 했습니다. 루가 15:2절,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99마리의 양을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려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뒤지는 여인의 비유.   

 

이 비유를 들으면 이런 합리적인 질문을 갖게 됩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99마리를 그냥 버려두는 게 말이 되나? 그럼 99마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지? 개역성경에 ‘드라크마’라고 번역되어 있는 은전 한 닢은 노동자 하루 품 삯 정도인데, 그것 때문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찾았다고 친구들까지 불러 기뻐하며 잔치까지 벌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래서 당시의 문화와 역사 등 배경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에는 목자 6명 정도가 한 팀이 되어 600-700 마리의 양을 쳤다고 합니다. 한 목자가 100마리 정도의 양을 치게 되는 거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으러 갈 때는 당연히 다른 목자에게 99마리를 맡기고 가는 겁니다. 

 

여기서 목자가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구하기를 그냥 포기한다면, 남은 99마리의 입장에서 자신도 언제 잃은 양이 될지 모르는데 불안하게 느낄 겁니다. 그런데 잃은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를 보면서 99마리 양들이 목자를 더 신뢰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또 유대인들은 딸이 시집갈 때 드라크마 열 개를 엮어 장신구를 만들어 주며 복을 빌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홉 개가 있어도 온전한 것이 아닌 것이죠. 잃어버린 한 개를 찾아 열 개가 있어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이런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신 겁니다. “너희가 그토록 업신여기며 죄인이라고 무시하는 저 사람들도 하느님께는 너희들과 똑같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손가락질 받고 무시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죄인들이 아니라, 어떤 수고와 희생을 치르더라도 함께 해야 하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너희가 하느님을 경외한다고 애써 율법을 지키며 최선의 노력을 다해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구나.“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회개하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7.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10.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하실 때 세리나 죄인들도 이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회개란 무엇일까요?

먼저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 주님이 바라시는 회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삶이 하느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스스로 의롭게 여기며 사는 그들도 실상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죄인임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리나 죄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사람들임을 알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환대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에게 회개란 자신이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가난하고 못 배우고 무식해서 율법을 잘 지키지도 못해 죄인 취급받으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았는데,  내가 세금을 거둬 로마에 갖다 바치는 세리가 되어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라는 죄책감에 고개도 못 들고 살았는데,  이런 나를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시며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귀한 존재임을 알아 누가 나를 업신여기거나 배척해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받지도 않고 비굴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비겁하게 굽실거리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때때로 율법을 지키지 못해도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당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 회개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혹 내가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평가하면서 내 안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면,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누구든지 환대하고 포용하는 사람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혹 죄책감과 무가치한 존재라는 열등감으로 살고 있다면, 내가 하느님께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크리스챤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래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사이 3장 12절에 이런 우리의 모습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뽑아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성도들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입니다.” 

 

이 말씀을 NIV 성경은 “Therefore, as Gods chosen people, holy and dearly loved,” 로 변역했습니다. 이 표현 중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들’이라는 표현이 ‘dearly loved’입니다. 여기서 ‘dearly’라는 말은 ‘애정을 가지고, 사랑스럽게, 극진히, 고가로, 많은 희생을 치르고, 대가를 지불하고‘라는 뜻입니다.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은 나를 그분의 자녀 삼으시고자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대속의 희생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하느님을 알지 못한 채 한 평생을 살다가 영원히 죽게 되는 우리였는데,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존귀하고 위대한 인생을 살도록 하시고자 예수님은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바치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dearly loved’ 사람들입니다. 옆에 계신 분에게 이렇게 고백합시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율법의 반역자인 예수도당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바울로가 이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는 자신이 누구보다도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1디모 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니다. 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주시고 하느님의 존귀한 자녀로 구원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그 사랑에 매여 그 사랑 -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감사성찬예배는 이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드리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여러분 모두 하느님의 ‘dearly love’을 깊이 깨달아 알아, 진정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예배자로 서시기를, 누구든지 환대하고 포용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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