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이 시대, 고엘이 되는 교회로!

by 분당교회 2019. 9. 15.

2019년 9월 15일 희년실천주일 설교/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추석 명절 잘 쉬셨나요? 추석 당일에는 보름달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저희 가족도 한 밤에 나가 보름달을 만끽했지요. 보름달을 보면서 잠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이 땅의 사람들이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추석성찬예배 설교하며 나누었던 말이 있습니다. 발달장애인을 섬기는 라르쉬 공동체를 설립하신 장바니에님의 말씀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배제된 축제는 진정한 축제가 아니다. 그들을 위한 축제도 진정한 축제가 아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축제가 진짜 축제다.”

 

우리들만의 축제란 가짜라는 것입니다. 환대가 있는 축제, 연약한 자를 포용하는 축제, 함께 어울리는 축제가 진짜입니다. 우리는 명절 축제를 누리지 못하는 이웃들이 참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상업적인 이유로 스스로 명절 축제를 파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명절에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실향민, 이주노동자, 난민,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 아픈 건 뉴스를 보니까 추석 명절에 거리에서 농성하는 일터만 전국에 무려 40여 곳이나 된다고 하더군요. 노동이 존중되어야 명절이 진정한 축제로 회복될 수 있겠다 생각합니다. 

 

오늘은 희년 실천주일입니다. 희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런 시대에 주님이 우리 공동체에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이나 안식년은 안식 곧 ‘쉬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쉼을 통해서 창조의 원형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하는 동안에, 살아가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상하고 피곤해집니다. 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몸도 쉬고 마음도 쉬는 가운데 창조 원형과 질서를 회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쉬면 창조의 원형과 질서가 회복되도록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토지도 쉬게 함으로써 토지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은 안식년을 일곱 번째 맞이하고 난 다음의 해를 복된 해라고 해서 ‘희년’으로 정하셨습니다.

희년은 안식 중의 안식으로서, 종으로 팔리었던 사람은 자유인이 되고 빚을 갚기 위해서 빚 대신 넘겨주었던 하느님의 기업인 땅도 원래 분배받은 사람에게 반환하는 법을 세우신 것입니다. 빚을 갚지 못해서 빚 대신 맡겼던 땅을 무상으로 도로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사유재산제도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세우신 법은 분명합니다. 원래 토지는 사유화해서 멋대로 사고 팔 수가 없는 것입니다. 레위기 25:23, “땅은 내 것이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희년은 그 해의 칠월, 곧 양력으로는 9월 중순 경에서 10월 중순에 이르는 우리나라 추석 즈음입니다. 희년을 선포하는 날은 속죄일로도 지켰는데, 뿔 나팔을 큰 소리로 사방에 불면서 전국에 희년을 선포하였습니다. 

레위기 25:10, ‘오십 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개역성경으로는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로부터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땅을 떠나 살았으면 다시 돌아가라는 말씀이고, 하느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 친족과 일가들이 한데 모여 살아야 할 장소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희년을 지키러 고향을 찾게 되면 하느님께서 자기 가문과 자기 가족에게 위탁하신 하느님의 기업을 점검합니다. 땅의 관리 책임이 얼마나 성실하게 되고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팔았던 땅이 있었으면 회복시켜야 하고, 남에게 빌린 땅, 빚 대신 맡았던 땅이 있으면 원래의 관리권자에게 반환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희년에 우선적으로 실천했던 일입니다. 

이 시대에도 희년법이 시행될 수만 있다면,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자들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의 가계부가 옥죄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세계경제는 소수의 토지소유자들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는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대결과 투쟁이 없어지고, 역사에 유례없는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 분명합니다.

 

루가복음 4장 16절 이하에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던 때에, 이사야서 61장 1절 이하,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이 희년의 예언을 읽으시고 이것이 자신을 통해서 성취됨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희년의 주인은 우리 주님이시고, 희년의 혜택은 죄 많은 우리 인간들이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말로 교회는 깨어서 이 세상에 하느님의 질서 곧, 희년의 법을 실현시켜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하느님의 말씀의 일부를 임의로 경홀히 여기는 과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근간으로 경제 영역에 새로운 질서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적 토지법은 세상에 새 빛, 새 소망을 줄 것입니다. 이미 믿음의 선각자들, 특별히 100여 년 전에 ‘진보와 빈곤’이라는 저서를 펴냄으로써 성서적 토지제도의 현대적 실현을 부르짖다가 죽은 ‘헨리 조지(Henry George)’ 같은 분들은 바로 이 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헨리 조지의 뜻을 좇아서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자신의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의 작품들을 통하여 토지공개념을 계몽하고자 애썼습니다. 

또한 헨리 조지가 주창한 성경적 토지법을 통해서 이 세상에 새 시대를 맞아들이고자, 같은 비전을 꿈꾸며 강원도 태백에서 예수원을 설립한 고 대천덕 신부는 희년운동을 일으키고, 2002년에 작고하고 말았습니다. 예수원 입구에 큰 바위에 말씀이 새겨 있습니다.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라.”

성경적 토지제도의 관점에 입각해서, 토지와 자유연구소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시장 친화적 토지공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구체적인 정책으로 불로소득에 과세하고 노력소득에 면세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과 토지공공임대제를 시행함으로써 하느님의 토지법으로 정의를 이룩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노동의 산물은 보장해 주며, 토지에서 나는 이익은 모두가 함께 나누는 방식을 취하여 토지에 대한 모두의 권리를 보장하는 가장 유효적절한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는 분단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가지 경제체제로 나뉘어 있는 남북한은 이제 통일된 국가로의 체제전환을 준비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이 시대를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희년토지법을 제정해 두셨습니다. 한국교회는 한반도에서 이 희년토지법을 성공적으로 실험-실천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가운데,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시켰던 위대한 신앙인 윌리암 윌버포스 같은, 통일 조국에 성경적 토제제도를 입법화하는 지도자가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여러분 모두가, 온전한 복음 - 성경 진리로 무장하여 우리나라에 하느님의 정의와 공의,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고 희년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원 설립자이신 고대천덕 신부님은 이 하느님의 희년의 법의 실천이 온전한 복음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땅에 희년법에 기초한 성경적 경제정의가 이루어지도록 예언자적인 외침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 가르침에 따라 성경적토지정의모임이 만들어졌고 헨리조지협회와 함께 “희년함께”라는 기독교선교단체로 발전했습니다. 희년함께는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라는 레위기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도록 연구하고 가르치고 정책 제안을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 보시면 “희년함께”에서 정리한 희년실천지침이 나와 있습니다. 누가 큰 소리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1. 교회와 성도들은 교회 건물이 ‘소유’가 아닌 ‘사용’하는 것이라는 인식 전환을 하고, 남는 교회 건물/공간에 대해서는 선교와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2. 이웃사랑 차원에서 다주택을 보유한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시세차익을 얻기 위해 전월세 값을 무작정 올리지 않고 동결해 줍니다.

3. 교회와 성도들은 투기 목적이 아닌 실수요 목적의 필요한 부동산만을 구입합니다.

4. 교회는 교인들끼리 서로 빚을 지고 오랫동안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서로 탕감해주는 예배나 행사를 엽니다.

5. 가난한 이웃과 형제자매의 자립을 위해 낮은 이자 또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사업을(희년은행) 교회 내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교회는 이런 일에 우선을 두고 재정을 사용합니다.

6. 교회는 가난한 이웃들이 공과금을 못내 끊겨 있는 전기와 수도, 가스 등을 쓸수 있도록 공과금을 대신 내줍니다.

7. 기독교인 사업가는 이윤추구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용 창출과 노동자의 복지향상을 핵심 목표로 사업을 경영하고, 노동자에게 일한 만큼의 대가를 충분히 주면서 노동착취를 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8. 기독교인 사업가와 노동자는 단지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과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고 돌보면서 생산 활동을 합니다.

9. 마음과 물질을 서로 나누는 공동체를 힘써 이루어 대안적인 소비와 문화를 만들어 나갑니다.

10. 희년실천을 하기 위해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따릅니다.

 

여러분 각자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공회분당교회도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성공회 분당교회가 ‘이 시대에 고엘이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고엘’이라는 단어는 레위기 희년법에 나옵니다. 레위기 25:25, “네 동족 가운데서 누가 옹색하여 제 소유를 팔았을 경우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그가 판 것을 되돌려 살 수 있다.” 개역성경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기업 무를 자’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룻기 3:9, "'너는 웬 여자냐?' 하고 물었다. '비녀는 룻입니다.'하고 룻이 대답했다. '어르신네께서는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 그 옷자락으로 저의 몸을 덮어주십시오.' 

 

여기서 ‘어르신은 이 몸을 맡아주실 분이십니다’라는 표현은 보아스가 룻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개역성경에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기업 무를 자’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바로 '고엘'입니다. 고엘이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등의 뜻이 있습니다. 고엘의 의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근족이 노예가 되었을 경우 돈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어야 했습니다(레 25:47-49절). (2)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 친족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했습니다(민 5:8 35:12-21). (3) 근족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 과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주어야 합니다(신25:5-10 마22:24). 즉,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아들로 간주되어 족보에 대신 이름이 올려 졌으며 또한 그 기업을 상속하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 고엘이 되기 위하여, 2독서에 등장하는 바르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사도 4:36-27, “36  키프로스 태생의 레위 사람으로 사도들에게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르나바라고 불리는 요셉도 37  자기 밭을 팔아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바쳤다.“ 톨스토이의 신명이 바르나바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네요.

 

그리고 실천지침 5번과 6번 9번 같은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우뚝 서면, 재정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느님의 사랑을 흘러 보내는 주님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룻에게 고엘이 되었던 보아스가 지녔던 헤세드의 마음이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으로 이 땅에 공평과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실천하여, “이 시대의 고엘이 되는 교회”를 세워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미카엘 모든천사 축일 / 대한성공회설립기념일  (0) 2019.09.29
주님이 기뻐하시는 회개!  (0) 2019.09.22
여성선교주일  (0) 2019.09.01
거룩이란?  (0) 2019.08.25
불길이여 타올라라!  (0) 2019.08.1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