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불길이여 타올라라!

by 분당교회 2019. 8. 19.

2019년 8월 18일 설교문

김장환 엘리야 사제 

 

불길이여 타올라라!

  

지난 주간에는 일본과 관련된 기념일이 많았습니다. 8월 14일은 위안부 기림일, 8월 15일은 74주년 광복절이었습니다. 8월 14일 수요예배 시간을 드리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일본이 과거의 만행을 반성하고 양국 관계가 정상화 되기를 바랍니다. 남과 북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로 동아시아에 평화의 질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주보 2면에 8.15 74주년 한일성공회 공동선언문이 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읽은 복음은 두 단락입니다. 그런데 각기 듣는 대상이 다릅니다. 앞 단락 49-53절은 12장 22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에 이어진 말씀이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두 번째 단락 54절-56절은 54절,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시작하는 대로 군중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와 군중은 예수님께 나오는 태도, 말씀에 대한 반응에 따라 구분됩니다. 루가복음 9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불러 파송하십니다. 10장 1절에서는 72제자를 불러 파송하십니다. 이렇듯 제자는 예수님께 부름 받아 그를 따르고 파송 받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6장 13절을 보면, 일흔 두 제자들 중에 뽑은 12제자를 12사도라고도 부릅니다. 

 

이에 반해 군중이란 자기 필요를 채우려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오병이어 기적으로 배불리 먹여 주시니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11장 29절, “군중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며 세상에 나가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 사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위로와 평안을 구하고 문제 해결 등 자신의 필요 때문에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이 군중입니다.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군중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제자, 군중 각각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먼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49절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주 전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답하십니다. “율법서에는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이 말씀은 성서에 대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불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것에 따른 메시지와 적용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루가는 ‘불’을 ‘성령’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루가 3:·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멀지 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예수님은 제자들 안에 성령의 불이 활활 타오르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성령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1:8,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루가는 승천하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루가 24:47-49, “47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49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며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모습을 사도행전 2장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 2:3,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사도행전의 저자 역시 루가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으니 거리에 나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확장됐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성령의 불을 받아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비전이 성취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치르셔야 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입니다. 5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바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르는 대속의 죽음입니다. 마르 10: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기 위함이다. 요한 16: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성령의 불을 받는 사람들은 1독서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말씀의 불이 타오르게 됩니다. 예레 23:29, “내 말은 정녕 물같이 타오른다. 망치처럼 바위라고 부순다.” 하느님의 말씀은 생각과 마음을 변화시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고 말씀에 순종하는 열정을 일으킵니다. 오늘 서신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이 그런 분들입니다.

 

2019년 올 해 연중주일에는 루가복음을 읽고 있습니다. 루가복음의 대표적인 특징은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소유와 재물에 관한 문제를 깊이 언급하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우선적 선택을 강조합니다. 

 

지난 몇 주일 들어온 말씀들이 그렇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사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라,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있다’

 

루가복음을 정독해 보십시오. 그리고 루가복음이 부담스럽게 다가오고 마음이 불편하다면, 여러분은 실제로 경제적인 부자입니다. 그럼에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의 마음이 생긴다면, 말씀의 불, 성령의 불이 타 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 주 중에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숨진 채 발견된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작고 초라한 휴게실에는 에어컨은커녕 창문도 환풍구도 없이 30도가 훨씬 넘었다고 합니다. 서울대에 휴게실에 에어컨조차 설치해 줄 돈이 없단 말입니까? 큰 아이가 살던 기숙사에 가보니 학생들이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틀어놓고 살던데, 교수실은 크고 쾌적하기만 하던데....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가난한 사람들,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복되고 있는 비극입니다. 

 

이런 비극적인 뉴스를 듣고 오늘 시편을 읽으니 마음에 분노가 타오릅니다. 시편 82:3-4,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 주고 없는 이와 구차한 이들의 권리를 찾아주며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풀어주어라.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하신 주님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성공회 분당교회 신자들 안에, 대한성공회 신자들 안에 성령의 불이 타올라 오늘 시편 말씀대로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이루기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씀의 불이 타올라 제자의 삶의 살게 되면 가까운 관계 안에서부터 갈등과 분열이 일어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 바르나바의 경우를 상상해 봅시다. 그는 땅이 많았던 부자였습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일 것입니다. 바나바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불을 받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지난주일 복음 기억하시는지요? 루가 12:33-34, 33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해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34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바르나바는 이 말씀에 따라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갖다 놓고 공동체 안에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 쓰도록 하였습니다. 교회 안팎의 사람들은 바르나바를 칭찬하고 존경했지만, 바나바의 부모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놀랐을까요? ‘애써 벌어 물려준 유산을 팔아 내어놓다니... ’ 노여움을 샀을 것입니다. 가족 안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오지로 나가는 선교사의 부모나 가족이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가족 안에서 얼마나 갈등하고 갈라질까요?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 싸우다가 감옥에 가거나 고난을 당하면 그 가족들은 또 얼마나 힘들어할까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기에 갈등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거짓에 속한 사람들은 반대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자들이 더욱 성령으로 충만하여 진리가 결론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제자가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두 번째 단락 - 군중에게 하신 말씀을 잠시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기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시대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는 군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연계의 관찰에 숙달된 사람들, 작은 징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고 잘 포착하는 사람들은 귀신같이 날씨의 변동에 대해서 잘 알아 맞춥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들은 서쪽에 구름이 일기 시작하면 “비라도 올 모양이다. 빨리 빨래 걷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지중해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서쪽에서 다가온 구름은 이스라엘 쪽으로 다가오면서 즉시 비로 변화되었습니다.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오늘 날씨 엄청 덥겠네.”라고 투덜거렸습니다. 팔레스타인을 향해 불어오는 남동풍은 전형적으로 더위를 몰고 오는 바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작은 자연적인 징후를 통해 잠시 후, 몇 시간 후, 다음 날의 기상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 예측하곤 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느님이 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생각과 관심이 온통 세상의 것에만 잔뜩 기울어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경한 어조로 질타하십니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조는 알면서도 이 시대의 뜻은 왜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이 시대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이 바로 그토록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이심을 알아차리고 믿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을 무시하던 어제의 나와 과감하게 결별하고 하느님께 돌아서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이 의롭게 여기시는 일을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성령의 불을 받으라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가는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중들에게는 예수님이 구원자임을 깨달아 알고 믿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구원의 축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신 히브리서는 바로 이것이 주님께 기쁨이 되고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고 증언합니다. 히브리 12:2,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생각하며 부끄러움도 상관하지 않고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어 내시고 지금은 하느님의 옥좌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성선교주일  (0) 2019.09.01
거룩이란?  (0) 2019.08.25
믿음의 노래를 부르자!  (0) 2019.08.11
쩨다카를 행하는 청지기로 살라!  (0) 2019.08.04
기도하고 공부하고 일하라!  (0) 2019.07.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