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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쩨다카를 행하는 청지기로 살라!

by 분당교회 2019. 8. 4.

2019년 8월 4일 다해 연중 18주일

설교말씀 : 김장환 엘리야 사제 

 

엄중한 시기입니다. 금방 풀릴 것 같지는 않지만, 한일의 관계가 잘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되어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디어가며,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폭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는 서울교구 주일학교 연합캠프가 2박 3일 동안 진행됩니다. 섬기는 스탭들을 위해서, 안전하고 은혜로운 시간이 되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교사로 수고하실 강사은 사무엘님, 박철성 형제님, 고맙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부모가 유산을 남기고 돌아가시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재산 싸움이 일어납니다. 예외가 없더군요. 그렇지 않은 가정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싸움이라도 할 유산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오늘의 복음이 이런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13절, “군중 속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선생님, 제 형더러 저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형제는 아버지의 죽음이 주는 슬픔 보다는, 남겨진 재산의 분배에 대해 관심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그렇죠....

 

모세 율법에 의하면 형은 2/3, 동생은 1/3의 유산을 상속받게 되어 있습니다. 형이 재산 분배를 미루고 있었든지,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는 적게 주었든지, 형제간에 갈등이 발생했고, 동생이 예수님께 이 문제의 해결을 요청해 왔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 사회에서는 불공정한 유산분배 문제로 랍비들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가르침이 뛰어난 랍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생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14절,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 하고 대답하셨다.” 

 

당혹스럽습니다. 언제나 공정하신 예수님이 억울한 사람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다니요. 동생의 요구가 잘못된 건가요? 여러분도 동생처럼 억울한 처지라면, 이렇게  요구하지 않겠어요?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반응하셨을까요? 15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탐욕에 있다고 지적하시는 겁니다. 탐욕은 더 누리고, 소유하고 싶은 끝없는 욕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사회는 이 탐욕을 부추기는 체제입니다. 돈 많이 버는 것을 잘 산다고 말하는 맘몬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부의 편중은 심화되고 부가 세습되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20세기에 이런 불의한 사회를 극복해 보고자 최고의 실험을 했었습니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보고자 했던 사회주의 혁명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회주의 국가는 맘몬 앞에 굴복했습니다.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도 그 어느 사회 못지않게 불평등과 부패가 심하기만 합니다. 탐심이라는 인간 내면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사회 불의와 부패의 근본 원인이 되는 탐욕을 성경은 영적인 문제로 봅니다. 오늘 서신 골로사이 3장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5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6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근본적인 죄가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탐욕은 자기 욕망을 채워가는 자아숭배자로 살게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18절에, 내 창고, 내 모든 곡식과 재산, 19절에 내 영혼. 얼마나 자아중심의 사람입니까?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느님에 대해 갖는 자기중심의 삶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자아 숭배를 말합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19절, “내 영혼아,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소유에 행복의 기반을 두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에는 자기 가족이 포함됩니다. 현대사회에는 반성경적인 개인주의와 가족이기주의,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합니다.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부자의 경우라면 어떻게 하실까요? 뜻밖에 몇 년 치 소출을 추수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시대의 가치관으로 보면, 부자는 잘못한 게 없어 보입니다. 열심히 농사를 지었으니 소출이 많았겠지요. 또 하늘도 도와줘서 대풍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농사꾼은 일 년 농사로 일 년을 사니까 창고도 그 정도 규모였는데, 대풍으로 몇 년 치 소출을 추수하게 됐으니 창고를 늘려야겠지요.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말하는 롤 모델 아닌가요?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저축도 하고 투자도 해서, 좋은 집에 좋은 차 굴리며, 좋은 거 먹고 노후를 준비하는 잘 사는 사람!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20절,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하셨다.” 행복의 기반을 소유, 물질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1독서 호세아서에서 보게 되는 하느님의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행함으로 샬롬의 왕국인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만방에 하느님을 높이려고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쩨다카를 명령하는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탐욕을 만족시켜 주는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야훼께도 예배를 드리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탐심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우상숭배로 이스라엘에 공평과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심판대 앞에 선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와, 공평과 정의를 행함으로 심판을 면하기를 호소하십니다. 호세아 11:9,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 20절, 21절의 말씀에 담겨 있는 주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종말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누구나 주님의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때 받게 되는 심판의 기준이 명확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행한 사랑이 구원의 기준입니다.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하느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 사회적 약자, 사회적 소수자를 돌아보며 쩨다카를 행하는 청지기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십니다. 21절,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르면서도 하느님께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 인색하지 말아야 종말의 심판을 면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인색하다는 것은 바로 쩨다카를 행하지 않는 불신앙을 말합니다. 관계적인 정의, 분배적인 정의인 쩨다카는 구체적으로 물질의 나눔으로 실현됩니다. 하느님께 인색 한가 아닌가를 가장 쉽게 확인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신대원 전도사 때부터 교회 사목을 하면서 보게 되는 것은 성공회 신자들이 전반적으로 하느님께 인색한 것 같습니다. 신앙의 기본이 되는 예배와 헌금을 소홀히 여깁니다. 십일조를 설교하면 개신교적이라고, 구약법이라고 고상하게~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 고상함에 가려진 마음의 중심을 보면 하느님께 인색한 탐심이 있습니다. 

 

인색함에서 변화되어 쩨다카의 삶의 살아가는 신자 이야기입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 신자 중에 서울대성당 출신 신자가 있었습니다. 성공회 출신답게 헌금이 약했습니다. 예배 출석도 들쑥날쑥 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성장을 갈망했는지 제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예배 생활이 달라지고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간증하기를 십일조를 하면서 지출의 우선순위와 살림 규모가 달라지니 생활에 큰 무리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이 부부의 변화는 놀라왔습니다. 교회 승합차가 오래 돼서 힘도 딸리고 녹도 쓸었습니다. 교회 재정이 빠듯해서 새 차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가정이 50개월 할부로 카니발을 봉헌했습니다. 교회 위치가 워낙 외진데 있어 주일마다 차량운행을 합니다. 주로 어르신들이 이용하는데 스타렉스는 높아서 타기 불편해서 좀 더 비싸지만 타기 편한 카니발로 구입해 봉헌했습니다. 

 

제자교회 헌금 항목 중에 바나바 헌금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을 바나바처럼 도와주자는 목적헌금으로, 주는 사람은 비밀로 하고 받는 사람을 지명해 봉헌합니다. 사업이 망하고 월세를 살며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을 위해 500만원씩 두 번이나 바나바 헌금을 봉헌했습니다. 나눔의 집 소식지를 보니까, 매달 10만원씩 후원도 하더군요.

 

더 놀랄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사임을 결정하고 나서 어느 날 신자회장님께 그 가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발생한 부채가 있는 걸로 아는데 모두 얼마냐고 물어보더랍니다. 수원 경희대 옆에 성당 부지를 구입하고는 건축규제로 성당을 짓지 못해 내게 된 세금이 3500만원, 어느 해 재정이 어려워 진 부채가 2000만원, 교육관 시설 구비하는데 부족해서 진 부채가 1500만원, 해서 총 7000만원 은행 대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자회장님이 착각해서 8000만원 있다고 하셨는데, ‘신부님이 빚 남겨놓고 가시면 안 된다’고 며칠 안에 헌금했습니다. 신자회장님이 착각해서 1000만원을 더 말했다고 하니, 헌금한 거니까 그냥 좋은 곳에 써달라고 하더랍니다. 

 

수원교회부터 제자교회까지 15년 이상을 함께 지냈으니 그 집 살림살이를 제가 잘 압니다. 남편은 월급쟁이였고 부인은 수학 과외하며 열심히 사는 평범한 가정입니다. 몇 억 대출받아 아파트 산 것도 알고 있고 아이도 셋이나 됩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전화했습니다. 살림도 넉넉하지 않은데 어떻게 헌금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아요.’라고 답하더군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하느님께 인색하지 말라’는 말을 헌금 많이 내라‘는 말로 들으실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십일조를 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헌금 애기가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에 탐욕이 살아있어 나 중심의 자아숭배자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진정 예수님이 주인되셔서 수입이 많든지 적든지, 하느님 앞에 청지기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를 통해 쩨다카가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가 드러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주인이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골로 3:2-3, 2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3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하여 나의 존재됨이 청지기임을 압니다. 청지기는 인색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니까요. 주님이 맡겨주신 것이 적든 많든, 무엇이든지 그것으로 쩨다카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 공동체는 교우들이 정성으로 봉헌한 물질을 투명하고 바르게 사용합니다. 알뜰하게 교회 살림을 꾸려가면서, 가난한 성도와 이웃을 돌보는 구제에, 개척교회와 선교사를 돕는 선교에, 공평과 정의를 위해서 애쓰는 기독교 NGO나 의로운 사람들을 돕는 일 등에, 힘껏 더 많이 흘러 보낼 수 있다면 하느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이나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에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그 어떠한 탐욕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인색하지 않는, 하느님께 부요한 사람이 됩니다. 

쩨다카를 실천하는 청지기로 살아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하느님께 인색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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