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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의 마음으로, 곁으로!

by 분당교회 2019. 7. 14.

2019년 7월 14일

김장환 엘리야 사제

 

주님의 마음으로, 곁으로!

 

지난 수요일 구기설 프란시스, 이공자 요안나 교우 간이식 수술에 중보기도로 사랑의 마음을 모아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수술은 잘 되었다 하구요, 이후 경과는 잘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회복의 은총으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즘은 악화된 한일관계, 빈번한 노동자들의 투쟁 등으로 조금은 혼란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사안마다 보는 이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다름이 자칫 분열로 심화되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지만, 여러 사건과 이슈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2독서 사도 바울로가 골로사이 교우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를 보며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골로사이서 1장 9절 이하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성령께서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또 우리 공동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하여 주소서.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으로부터 오는 온갖 힘을 받아 강하여져서 모든 일을 참고 견딜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게 하소서.” 아멘!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면 하느님이 기뻐하십니다. 말씀에 따라 살면 열매가 맺어집니다. 지난주일 설교대로, 기쁨을 누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고 하느님을 더 깊게 알아가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골로사이 교우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게 되기를”을 첫 기도로 올린 이유입니다.

 

바울로가 골로사이 교우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한 배경이 있습니다. 골로사이 교우들은 골로사이 지역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키벨레를 섬기는 토속신앙, 미드라를 섬기는 신비 종교, 초등학문으로 번역된 헬라 사상, 그리고 영지주의와 혼합주의적 유대교 등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에 많은 혼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신앙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됩니다. 한국교회는 토속적인 샤머니즘 영향으로 기복주의 신앙에 빠졌습니다. 불교의 영향으로 내세주의 신앙이 강합니다. 세상의 문화와 가치관에 오염되어 성공주의, 성장주의에 물들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성장했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는 멀기만 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왜곡하는 아마지야 같은 거짓 예언자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1독서 아모스 1장을 보면, 아모스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근동의 여러 나라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합니다. 다마스쿠스, 가자, 블레셋, 띠로, 에돔, 암몬, 모압, 남유다, 북이스라엘 모두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라는 표현이 계속 반복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죄란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아 불평등과 불의가 쌓였다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의는 모든 민족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기준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하느님 나라를 세워가는 제사장의 국가’로 선택받았기에 그 심판이 더 엄중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심판 예언은 심판이 목적이 아닙니다. 불순종의 죄악으로부터 돌이켜 심판을 면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거짓예언자 아마지야는 왕과 부자들이 듣기 좋게 “평안하다, 번영이다. 안심이다.” 거짓을 말하며 자기 안일을 구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거짓 예언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공평과 정의, 환대와 포용이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경제논리와 배제와 차별의 논리 등 반 성서적인가치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 시대 거짓예언자에 미혹당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실로 중차대한 신앙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가 지닌 관점이니,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잘 아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황금률입니다. 이에 율법학자는 ‘누가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지는 율법학자를 묘사하는 “율법학자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라는 성서의 표현이 의도하는 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을 철칙을 알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이니만큼, 나름 이웃 사랑하는 일에 율법학자가 얼마나 열심을 기울였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제헌금을 열심히 드렸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금식도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선을 베풀며 사는 자기 자신을 대견해 하며 이 정도하면 됐다 여겼을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주의자들의 자기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은 말씀대로 잘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죄인이라고 정죄하며 자기와 구별했습니다. 자신은 거룩한 선민이기에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들이나 이방인들하고는 상종초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웃은  자기 의를 위한 대상일 뿐입니다. 그가 베푸는 자선은 언제나 시혜적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려 주시며 율법학자가 지닌 이웃사랑의 지평을 넓혀 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반 쯤 죽을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거룩하다는 사제가, 레위인이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강도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었다. 사마리아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 가서 하룻밤을 간호해 주었다. 그리고는 자기 주머니에서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간호를 부탁했다.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고 말하고 일을 보러 떠났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묻습니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학자는 대답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대화는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결론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입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구원의 문입니다.

 

현대에는 내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족 이기주의라고 하죠. 반성경적인 시대사조입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굶주리는 어린이들에게 후원하는 것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는 지구 저편 어린이에게 후원하며 사랑을 실천해도 옆에 있는 내 지체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사랑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여 새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공동체로 모아 주셨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는 구원의 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구원으로 인도해 줄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며 묵상해 봅시다. 나를 구원해줄 강도 만난 사람은 누구인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지나쳤는지? 곁으로 가서 할 수 있는 만큼 도왔는지? 돌아봅시다. (침묵 1분)

 

이 시대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비정규노동자, 장애우, 팔레스타인 국민들, 제3 세계 어린이 노동자, 세계 각국에서 발생하는 난민, 파괴당하는 생태계, 여성들, 이주노동자, 또?? 청소년들? 청년들? 저는 난민들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는데 공정무역 커피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늘 죄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분당과 인근 지역에서 적어도 중산층 정도로 살고 있는 우리는 강도 만나 반쯤 죽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사실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 강도만난 이웃들을 바로 알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 다가가, 어떻게 그들에게 맞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환경주일, 희년실천주일 등등으로 특강을 갖는 이유입니다. 신앙적인 고민을 함께 해나가도록 더 많은 주제로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실천을 모색해야 합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는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기도회’를 자주 가졌었습니다. 노동자 파업 현장에 가서 함께 예배드리고 저녁을 대접하며 연대한 것이죠. 내일 저녁 7시 30분에도 효자동주민센터에서 톨케이트 노동자들과 기도회를 갖는다고 합니다. 시간되시는 분은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지닌 마음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많이 나오는 예수님이 지니신 마음입니다. 마태오 9:35,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 측은지심, 애간장이 녹는 사랑의 마음, Compassion! 함께 아파하는 마음!

 

카톨릭 일꾼이라는 사이트에서 읽은 칼럼을 읽어드립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복음적 명령’이라고 표현합니다. 시몬 베유라는 사상가는 “그리스도교는 노예들의 종교”라고 말했는데, 도로시 데이라는 카톨릭 실천가는 그 노예들의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신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노예처럼 살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권력과 제도는 상대화 됩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신 복음만이 삶의 유일한 기준이 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이며 “천한 자의 복음은 복음을 천하게 만든다”고 부정적으로 말했지만, 사실 그 사람만큼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사람도 없습니다. 니체는 예수에 대해 “비천한 민중, 추방된 자, 죄인들을 지배질서에 대항하도록 불러 모으는 이 거룩한 무정부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주인의 가치를 부인하고 파괴하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했습니다. 

 

노예의 도덕에서 핵심가치는 가련한 자에 대한 ‘동정’(compassion)입니다. ‘동정’은 타인의 슬픔을 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감 능력입니다. 귀족이나 엘리트는 타인에 대한 ‘거리 두기’에 능숙합니다. 노예들은 불쌍하지만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런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람이 예수님이며, 그런 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난 주중에 내년도 최저임금이 결정되었습니다. 2.87% 인상으로 합의되어 내년에 시급이 8,590원입니다. 한 달 일하고 잔업수당 등 이런 저런 것 합치면 200만 원정도 받게 되는데 대부분이 4인 가족이라고 합니다. 가장이 벌어오는 이 돈으로 한 가족이 살아가야 하는 그들의 처지를 우리는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최저임금결정과정이 진짜 힘든 자영업자나 영세기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진행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진짜 그렇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최저시급으로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의 현실에도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상생할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런데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위원회에 사측에서 나온 사람이 최저시급을 4, 5천으로 낮춰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람인지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 헤세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사랑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죽어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에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측은지심,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계속 부어주시는 바로 이 주님의 마음을 따라 이 시대 강도만난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고, 그들을 싸매주고 하나 될 때 강도 만난 이웃도 살고, 나도 삽니다. 이 삶이 이미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진리의 성령님이 주시는 모든 지혜와 판단력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거짓예언자들의 미혹을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며 그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여 여러분 모두 강도만난 사람들의 이웃이 되어, 하느님이 주시는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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