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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주님이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은?

by 분당교회 2019. 10. 27.

2019년 10월 27일 연중 30주일

성공회 분당교회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신부

 

 

오늘 예수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 바리사이파파 사람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이 인정하시는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십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자신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감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그저 하느님의 자비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는 들어갈 수 없는 죄인이기에, 성전 뜰에 서서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세리였다고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그가 세리보다는 훨씬 거룩하게 보입니다. 욕심도 없고 부정직하지도 않고 음탕하지도 않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 단식을 하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 이런 정도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은 바리사이파 사람을 칭찬하지 않고 세리를 올바르다고 인정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비유를 시작하실 때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9절, “자기들만 옳은 줄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1절, “보라는 듯이 서서” 기도했습니다. 스스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와 있지만, 그들의 마음의 중심은 교만과 자기 의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요한 클리마쿠스는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교만이라는 질병을 앓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속이 썩은 석류와도 같습니다. 교만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이미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 마귀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베드로 5:5하,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모임을 같이 하는 목사님이 깊이 한숨쉬시며 젊은 집사가 교회를 떠난 이야기를 들려주시더군요. 새벽기도를 열심히 드리시는 권사님이 계신데, 구역예배 때마다 ‘요즘 집사들은 새벽기도도 안 나오고 기도도 안 한다’고, ‘교회 재정이 어려운데 자식들한테는 쏟아 붓고 십일조도 안 한다고’ 꾸짖었다는 겁니다. 집사님도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며 열심히 섬기고 있는데 이런 저런 말을 들으니 권사님과 관계가 불편해지고 시험에 들어 다른 교회로 가버렸다고, 기도 많이 하시는 권사님 때문에 힘들다고 하소연하시더군요.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권사님이 보여주는 신앙의 행태를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율법이란 본디 하느님을 잘 섬기라고 주신 신앙의 기준들인데, 그것을 열심히 지키며 살다 보면, 스스로 나는 잘 믿고 있다는 “자기 의”가 형성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 보면, “넌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판단하고 정죄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암세포처럼 자리 잡고 있어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자기 의라는 교만에 빠지게 되는 원인은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신앙을 비교하려면 성인들과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명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성인과 같이 나도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가 고난에 처했을 때, 주위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로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16 내가 처음으로 재판정에 나갔을 때에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모두가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나를 버리고 간 그들이 엄한 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17 주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완전히 선포할 수 있었고 그 말씀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신앙에는 생명의 성장 단계처럼 아이부터 어른까지 여러 수준의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는 가장 깊은 신앙으로 주님께 헌신한 제자들입니다. 바울로는 사도이기에, 그 깊은 외로움과 어려움 가운데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세상 유혹이나 고난에 실족하기 싶습니다. 그럴 때 공동체는 그런 사람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이끌어줘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숙한 사람은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 다만 신앙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본이 되고 본을 따르면서 마침내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는 날, 사도 바울로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디모 4:7-8,7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높고 크기 때문입니다. 에페 4:13, “마침내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자로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기도가 세리가 드린 기도입니다. 세리는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로 치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정권에 하수인이 되어 유대인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해 가는 매국노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혈연과 신앙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생활하는 공동체였는데, 세리들은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젤롯당처럼 해방을 위해 싸우는 의로운 사람들도 있지만, 그저 목숨이라도 살아가려고 이 짓 저 짓 다하는 민초도 있는 것입니다. 2000년 전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기가 얼마 힘이 들었겠습니까? 이 세리의 입장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당대에 세리가 더 나쁜 사람으로 취급받았던 이유는 로마의 권력이 있기에 착취할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세금만이 아닌 그 이상을 받아 자기가 중간에 착복하는 죄를 쉽게 범할 수 있었습니다. 루가 복음에 나오는 자캐오가 그랬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나를 업신여겨라. 그래도 돈이 최고다. 나는 이 돈으로 떵떵거리며 살련다.’ 자캐오는 물질주의 가치관을 가지고 열심히 착복하면서 돈을 모아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캐오가 살아보니 내면 깊이 외로움의 고통이 깊었습니다. 친족들도 따돌리고 친구도 없는 외롭고 소외된 인생, 그 자체였습니다. 빈 마음, 허전함으로 인생을 방황할 때, 예수님이 그 자캐오를 주목하시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의 집에 들어가 밥상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갔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난 감격 속에서 자기 자신의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착복한 것은 네 배로 갚았습니다. 그런데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의 주관자 되신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몇 주 전에 읽은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에게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유배지에서 살아내라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가 적국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조국이 멸망하고 식민지 포로가 된 이유가 나와 내 민족이 하느님 앞에 바로 살지 못했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었음을 알기에, 돌이켜 회개하면 하느님이 다시 조국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믿고 바라며 하느님이 허락하신 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갔습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만을 경외하며 살아갔습니다.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진실 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캐오는 세리로 살아가지만, 정직하게 살기는 결정하고 회개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세리에게도  주님 앞에 나오기에 부끄러운 그런 죄 된 삶의 흔적이 있고 그것이 죄책감이 되어 그 심령을 눌렸을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정해진 시간에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지만, 저 바리사이파 사람처럼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손을 쳐들기도 부끄럽습니다. 그저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이 한 마디였습니다.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런데 하느님은 바로 그 세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14, “잘 들어라.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세리였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모두 다 죄인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인생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비로소 그 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죽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죄의 값이 하느님과 단절되어 살아가는 영원한 죽음이기에, 나를 살리려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깨달아 집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나갈 때마다 내가 바리사이파 사람보다 완전하게 살아가지 못해도 하느님께서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 인정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워 주님만을 사랑하고 예배합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기도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생각과 말과 행실로 거룩하기를 소원하며, 청지기의 사명을 살아가려고 주님께 드리며 나누며 살아갑니다. 

 

여전히 세상 속에서 나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죄를 짓지만 주님 앞에 나와 세리처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진 그 사랑에 감사하며 새로운 용기로 믿음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우리 성공회는 정심기도로 죄의 고백을 드리고 기리에 엘레이숀을 기원송가로 부르며 하느님 앞에 나갑니다. 

 

이 시간, 세리와 같은 마음으로 기원송가 기리에 엘레이숀을 A곡조로 불러봅시다. 성가 68장입니다. 

 

<성공회 기리에 A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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