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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감사는 우리를 예배자로 살게 한다

by 분당교회 2019. 11. 4.

2019년 추수감사주일

설교 말씀

김장환 엘리야 사제 

(성공회 분당교회 관할사제)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농사도 짓지 않는 도시 교회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인생 여정을 새롭게 이해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변화시켜 주는 능력이 감사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처음 가르치는 말이 ‘엄마 아빠’입니다. 그 다음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이 말을 가르치는 이유는 ‘고맙다’는 말 속에 인류의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란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 인류가 오랜 역사 속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가 ‘감사’입니다. 행복은 결코 재물에도 명예에도 권력에도 있지 아니하고 감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오시어, 감사를 고백하신 분들은 분명히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행복을 누리며 살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많은 격언과 속담 속에 이 지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국속담 : ‘감사는 과거에게 주어지는 덕행이 아니라, 미래를 살찌게 하는 덕행이다.’ / 탈무드 :  ‘참된 지자는 모든 교육을 배우는 자요, 참된 강자는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이요, 참된 부자는 자신의 것에 대해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지요. 1데살 5: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사하십시오.’라는 말의 시제는 ‘약속된 시간뿐만 아니라 항상, 계속 반복해서’을 뜻합니다. 감사는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Image by msandersmusic from Pixabay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헤아리는 눈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인정하는 삶이죠.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은 나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분이십니다.  

 

먼저 감사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줍니다. 감사는 우리의 문제들을, 하느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법으로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다 내려놓게 합니다. 감사하면 주님의 평화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줍니다. 평화는 방어벽을 쌓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흐트러뜨리는 나쁜 영향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단순한 지혜를 잘 실천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를 어려워합니다. 에릭 호퍼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산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헤아리는 것이다.” 

 

오늘 서신을 보면,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고 권면한 사도 바울로가 이 어려운 산수를 잘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카 교회를 기억하는 가운데 감사를 헤아리며 그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4절, “교우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놀랍게 자라고 또 여러분 사이의 사랑이 더욱더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이 모든 박해와 환난을 당하면서도 잘 견디어내며 믿음을 지켜온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 고난에 찬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능력이 바로 이 감사의 고백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헤아리며 보람과 기쁨을 맛보는 행복한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주 중에 이 오늘 서신을 묵상하면서 분당교회 여러분을 향한 내 마음이 사도 바울로의 마음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에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고 있고 또 여러분 사이의 사랑이 더욱더 두터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로 우리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커가는 만큼 가족의 크기도 커 가고 나눔도 커 가고 있습니다. 월세, 관리비, 사제관 대출이자 등 막대한 고정 지출을 감당하면서도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 들어서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등 절기 헌금 전액을 외부로 플로윙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사랑이 커 가고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로처럼 저는 여러 교회에 여러분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교우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공동체가 사랑을 연습하는 훈련의 장이라면, 예배는 감사를 연습하는 훈련의 시간입니다. 성공회 예배를 ‘유카리스트’라고 하는데, ‘감사의 제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이름이 ‘감사성찬예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기도 때마다 고백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배는 하느님의 은총을 헤아려 감사를 드리는 찬양의 제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자캐오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존귀한 아들딸로 받아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에 고용되어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 갖다 바치며 살기에,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성전 안에는 감히 들어갈 수 없고 법정에서는 증인 자격도 없는 유대공동체에서는 완전히 배제된 존재입니다. 

 

Image by Alexas_Fotos from Pixabay  

그런 세리를 예수님이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겠다.” 예수님의 조건없는 환대입니다. 이에 자캐오는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어 들입니다.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구원의 감격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의 감격이 살아있는 사람이 감사로 하느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드림이 기쁨이 됩니다. 유카리스트, 감사의 제사인 예배가 실패하는 이유는 이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면, 감사가 없습니다. 은총이 아닌 결핍을 봅니다. 원망과 불평이 자라나고 욕망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자아라는 우상을 섬기게 되며 하느님을 수단화 합니다. 

 

내 욕망의 만족을 위해 속이고 움켜지며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 나와 예배하지만 그 내면은 우상을 따르며 살아갑니다. 이웃의 것을 내 것으로 취하여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1독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정해진 예배를 열심히 드렸지만, 우상을 섬기며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불의를 행하며 살아 멸망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이에 이사야는 혹독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지요. 

 

지난주일 복음에 본 바리사이파 사람도 그랬습니다. 성전에 나와 자기의 의로운 삶을 자랑하며 기도했지만, 그 거룩해 보이는 기도는 그의 불의한 삶을 포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욕심이 없다’고 감사하다고 기도하는데, 그들의 마음에 탐욕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루가 11:39,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속에는 착취와 사악이 가득 차 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개역개정) 

 

‘자신은 음탕하지 않다’고 감사했는데, 실상 그들은 그들의 음란함을 숨기고자 합법적인 이혼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마태 19:8,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아내와 이혼을 해도 좋다고 하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자신은 부정직하지 않다’고 감사했는데, 지금 보았듯이 그들은 하느님 앞에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선자였고 거짓말쟁이들이었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감사는 죄인인 나를 하느님이 사랑으로 나를 완전하게 받아 주셨다는 구원의 감격에서 시작됩니다. 자캐오가 그런 감격을 누린 사람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고 고백한 후 이어지는 성찬기도를 잘 새겨 들어보십시오.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거듭 확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신 자캐오는 이제는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기에,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얘기를 좀 하자면, 일반적으로 ‘세리는 매국노이고 로마제국의 앞잡이니까 돈 많은 세관장 자캐오도 동족을 착취해서 부자가 된 것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이라는 말을 새겨보면, 자캐오가 비록 세리로 사는 비루한 인생이었지만, 하느님 앞에서 나름 정직하려고 살아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좀 더 말씀드리자면, 키 작은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 나무에 오르고 사람들은 그가 나무에 있는지를 몰랐는데, 전지하신 예수님이 다 아시고 그의 이름까지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Image by Nancy McRae from Pixabay  

아닙니다. 평소 세리들과 친하게 지내던 예수님은 세리들로부터 예리고에 있는 세관장 자캐오가 있는데 나름 정직한 세리라고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 자캐오를 만나러 예리고 오신 것이죠. 돌무화과나무는 누가 올라가 있으면 환히 보이는 나무인데, 같이 가던 세리가 저 사람이 자캐오라고 예수님에게 말해 주었을 겁니다. 

 

그만큼 자캐오는 진지한 구도자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캐오처럼 지금 보다 더 나은 존귀하고 가치있는 인생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십니다. 그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 해 주십니다. 여러분도 그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이기에, 오늘 추수감사주일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구원에 감사하는 사람은 자캐오처럼,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캐오가 행한 일을 ‘쩨다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캐오로 인해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의 복을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는 구원의 감격이 이웃을 복되게 하고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 이 유카리스트, 감사성찬예배를 통해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어,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여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내어주신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고백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쩨다카를 행하게 되어, 여러분을 통해 가족과 이웃이 복을 받고, 여러분을 통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확장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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