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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연중 9주일 감사성찬례 설교문

by 분당교회 2018. 6. 4.

2018년 6월 3일 연중 9주일 감사성찬례 설교문

집전/설교 최성모 요한 신부  


구원의 하느님, 모든 민족에게 크신 뜻을 나타내시고 구원의 역사를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 하여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소서. 


신명 5:12-15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분부하는 대로 해야 한다.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 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딸, 남종 여종 뿐 아니라 소와 나 귀와 그밖의 모든 가축과 집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그래야 네 남종과 여종도 너처럼 쉴 것이 아니냐? 너희 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하던 일을 생각하여라. 너희 하느님 야훼가 억센 손으로 내리치고 팔을 뻗어 너희를 거기에서 이끌어내었다. 그러므로 너희 하느님 야훼가 안식일을 지키라고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시편 139:1-6,13-18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 앞뒤를 막으시고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 그 아심이 놀라워 내 힘 미치지 않고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 납니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주시고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주셨으니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때 깊은 땅 속에서 내가 꾸며질 때 뼈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것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그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나의 나날은 그 단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길 없고, 너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습니다. 세어보면 모래보다 많고 다 세었다 생각하면 또 있사옵니다. 



2고린 4:5-12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 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어둠에서 빛이 비쳐오너라’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예수를 위해서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설치고 여러분 속에서는 생명이 약동하고 있 습니다. 


마르 2:23-3:6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 함께 가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자 바리사이파 사람 들이 예수께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반문하 셨다. “너희는 다윗의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한 일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비아달 대사제 때에 다윗 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놓은 빵을 먹고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도 주었다. 그 빵은 사제들 밖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는 빵이었더냐?”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 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 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 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 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안식일에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밀밭 사이를 지나갈 때, 제자들이 밀 이삭을 훑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께 다가와 율법을 들이밀면 서 따져듭니다. “여보시오 예수 양반! 율법이라곤 한 글자도 모를 것 같이 멍청하게 생긴 당신 제자들이 지금 밀 이삭을 잘라먹었소. 오늘은 안식일이오. 당신의 제자들은 지금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말라는 율법을 어겼단 말이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율법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니, 율법을 열심 히 공부하고 배울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렇게 예수님께 따져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는 정말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전하고 있듯, 신명기를 포함하는 오경에는 꼭 지키 라고 당부하면서 안식일이란 말을 서른 세 번이나 사용합니다. 그중 몇 번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경우 서슴없이 죽이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선 그 생각이 다양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디까지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걸까? 밭에 나가 김매는 것은 일이니깐 하지 말아야겠고, 소에게 여물을 주는 것도 일인데 하지 말아야 할까? 그럼 소가 배고플 텐데.. 소가 배고프면 우유가 잘 안나올테고.. 안 되겠다, 우유는 매일 필요하니깐 소에게 여물을 주는 건 안식일에 해도 되는 것으로 하자. 자, 화장실에 가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것 모 두 괜찮은 걸까? 일한다는 건 힘을 쓴다는 거고, 소변은 그렇다해도 대변은 꽤나 힘을 써야 하니.. 그래! 안식일에 소변을 누는 건 괜찮고, 대변을 누는 건 안 되겠다!’ 



조금 많이 과장해서 웃으며 말씀 드렸지만, 정말 율법학자들은 율법학자대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이렇게 저렇게 정말 열심히 고민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느님의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서입니다. 


첫 번째 사건으로 다시 돌아가,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은 일하는 것이라고 당시 많은 율법학자, 바리사이 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 몇 개 훑어서 먹은 걸 가지고 말도 안 된 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밀 이삭을 훑는 것, 밀 가지 를 꺾는 것을 추수하는 것과 똑같은 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분명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오그라든 손을 고쳐주신 두 번째 사건은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탄식하시고 ‘노기 띤 얼굴’을 하셨다고, 오늘 마르코복음서 3장 5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예수님’ 하면 떠오르는 그분의 표정은 어떤 것인가요? 이 세상 모든 사람 을 다 사랑하시는 자비롭고 온화한 표정인가요? 이 세상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걸어가시는 깊은 고뇌와 번민의 표정인가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표정은 크게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강촌에 있는 프란시스 수도원에서 어떤 신자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가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 만, 피정관 로비에는 아주 호탕하게 웃고 계시는 예수님 그림이 놓여 있습니다. 그 신자분께서 제게 이렇 게 물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이렇게 웃으셨을까요? 저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 안 되네요.’ 그분의 생각 에 예수님은 언제나 잔잔한 물결같은 온화한 표정, 따뜻하기도 시원하기도한 엷은 바람같은 미소, 십자 가를 지시고 그곳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하시기까지 고통을 감내하는 표정으로만 떠올릴 수 있다고 했습 니다. 그분은 호탕하게 웃으시는 예수님도, 화를 내시는 예수님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했습니다. 그러 나 오늘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분명 화를 내셨습니다. 화를 참지 않고 탄식하시며 매서운 눈으 로 노려보셨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은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표정을 관습적으로 떠올리는 것처 럼, 우리자신역시늘온화하고미소띤표정을지어야만한다고생각합니다.그래서화를참지못하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는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입니다. 화 를 참다가 속병 난다는 옛말처럼, 화를 참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고, 화를 내는 것을 보면서 쉽게 실망하 는 것도 그못지않게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그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다양한 욕망도 그 자체 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원래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잘못이고 죄가 됩니다. 화도 마 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원래 목적에 맞게 화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화는 우리의 화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무엇에 그토록 화를 내시는지 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르코복음서 2장 27절의 예수님 말씀이 그 핵심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비록 여러 가지 많은 일들로 수고해야만 하는 삶이지 만, 거룩한 날 하루는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여자도 남자도, 아이도 어른도, 모든 사람, 심지어 집에서 부리는 가축도 이 날만큼은 쉬어야 합니다. 바로 그 이유와 목적 때문에 이 날이 거 룩한 날이 됩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율법입니다. 성별, 나이, 신분, 그 무엇의 차이도 안식일 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편안한 쉼을 가지는 것을 방해하고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경에는 하느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 쉬셨기 때문에, 그분의 모든 피조물이 쉬어야 한다고 써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처럼 휴식이 필요하실까요? 당연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천지창조와 연결시켜 생각할 만큼, 그래서 그렇게 성서에 기록할 만큼, 안식일을 정 말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으로서도 안식일의 규정이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지으신 모든 사람이 함께 누려야 한다는 생각은 오직 온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안식일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 님의 행동을 문제삼아 고발하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안식일에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을 예수님이 어기느냐 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습니까, 죽이는 것이 옳습니까?” 사람을 위한 율 법, 사람을 위한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규정에 얽매여서 사람을 살리는 일 조차 정죄하려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를 참지 않으시고 탄식하십니다.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 시며, 그들에게 보란 듯이 아픈 이의 오그라든 손을 펴주십니다. 


복음서는 그 즉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나가서 헤로데 일파를 만나 예수님을 해칠 방법을 모의했다고 기 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오직 예수 님을 해치기 위해서, 외려 하느님을 배반하고 헤로데를 따르는 변절자들을 만나 손을 맞잡았다는 말입니 다. 하느님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거룩한 체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과 가식이 여실히 드러납 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화는 정당한 분노입니다. 사람을 먹이고 살려서 위하는 일을 방해하고 막는 그 모 든 세력에 대한 정당한 분노입니다. 유다인들의 차별에 신음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의 마을에서 예 수님 일행을 쫓아낼 때에 그분은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당신을 모른다고 잡아떼던 베 드로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버린 다른 제자들에게도 그분은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악한 힘에 눌린 이들을 한없이 가엽게 보셨을 뿐입니다. 


우리의 화는 예수님의 화처럼 정당한 분노가 되어야 합니다. 나보다 작고 약한 이에게 나쁜 감정을 배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에, 그렇게 만들어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악한 힘에 탄식하고 화를 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주인이 되셔야 할 이 세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 군림 하며 돈 없는 사람을 무시하고 착취하는 것에 화를 내어야 합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것에 화를 내어야 합니다. 아주 못된 어른과 젊은이들이 약한 어린이와 노인에게 몸과 마 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에 화를 내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지 못하고, 사람보다 돈과 권력과 명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에 화를 내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안식일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행동강령의 세부지침을 확인하는 날이 아니라, 그 날을 거룩한 날로, 그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삼기 위해서 과연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 과연 어떻게 한 날을 엿새와 다르 게, 하느님의 날 답게,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날 답게, 거룩하게 삼을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뻔한 답이고, 그래서 슬프게도 진부하게까지 느껴지지만, 사랑 뿐이지 않겠습니까? 사랑이 들어서야 할 자리에, 다른 무엇도 들어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리이든, 정의이든, 신앙이든, 어느 무엇도 사랑의 자리에 들어서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의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자리에 사랑이 자리하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당신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 랑을 모든 사람과 함께하길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귀하고 똑같이 소중 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으시고 제가 드리는 마지막 말씀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이 빗물로 온 세상에 내립니다.
땅에 내린 빗물은 흐르고 흘러, 가장 낮고 구석진 곳으로 흘러 갑니다.
가장 낮고 구석진 곳부터 차례대로 빗물이 다 채워지고, 조금씩 조금씩 모든 곳을 빗물이 다 채워갑니다. 더이상 낮은 곳도 구석진 곳도 없이 모든 땅을 빗물이 다 채웠을 때,
이 세상 모든 것은 은총의 빗물이 이룬 잔잔한 바다 위에 모두 똑같이 떠 있을 것입니다.
높음도 낮음도 없이 이 세상 모든 이가 나란히, 그리고 하늘 위로 더 가까이 떠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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