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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삼위일체주일 설교문

by 분당교회 2018. 5. 27.

성삼위일체주일 설교문


저는 아내와 3년 정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인천에 살고 아내는 서울에 살아 만나지 못할 때, 마음은 늘 아내를 향하고 있었지요. 일주일에 한 번 데이트하는 날이 가까이 오면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데이트 날이 되면 몸이 마음보다 먼저 아내가 있는 서울을 향해 갔습니다.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고 헤어지기 싫어 누가 먼저 말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기 위해 결혼 했습니다. 아내가 가끔 불만을 터뜨립니다. 프로포즈도 받지 못했다고. 


이런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온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권한을 위임받은 지상대리자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이고 또한 창조주의 성품을 물려받은 존재라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와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연애할 때 예뻐지는 이유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 많이 들어온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사랑하십니다. 특별히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떠난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하는 구원을 선물로 주시고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오늘 복음 3장 16절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그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말을 깊이 묵상해 보면,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신 영원하신 하느님에게 피조물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존재 안에 사랑하는 대상이 내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을 경험하면서 하느님 안에 내재하는 사랑의 대상이 바로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 존재의 신비를 교리적으로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란 성부 하느님, 성자 하느님, 성령 하느님이 각각 다른 인격이신데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주보에 삼위일체 신앙 고백문인 아타나시오 신경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교리이지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앞서 연애와 결혼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우리 만남이 우연이 아니야’라고 고백하면서 결혼하여 부부일심동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고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유다인들의 신 인식은 유일신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결정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면서 예수님도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요한 20장 28절의 토마스처럼, 나자렛 예수를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보았으면 하느님을 본 것이라고, 하느님 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느님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죄 사함을 선포하시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이며 완전한 하느님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또 다른 하느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오순절에 임재하신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어떤 에너지나 파워가 아닙니다. It라는 단어가 아닌 He라는 대명사로 표현되는 인격으로, 파라클레토스, “나란히 함께 하도록 부름받은” Another Christ입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상담가로 변호자로 인도자로 도와주시는 the Helper이신 하느님이 성령님이십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제한적이어서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유일신으로 고백했지만, 구약성서를 보면 이미 하느님은 자신을 삼위로 존재하는 분을 계시하셨습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하느님이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것인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십니다. 강조형으로 복수 표현을 썼다는 의견도 있지만, 창세기에도 하느님은 자신을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창세 1: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학자들은 “우리”라는 말을 공동체로 존재하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제자들과 자신을 의미할 수 있으나, 삼위로 하나이신 하느님 자신을 표현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보 1면에 있는 그림은 15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위대한 성상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라는 작품입니다. 루블료프는 성삼위의 모습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창세기 18장 1-15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스토리는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나타난 세 사람을 지극히 환대하고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림에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사람으로 나타나신 삼위 하느님의 모습만 그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동물을 잡으러 간 사이의 장면입니다.


그림을 보십시오. 성배가 놓여 있는 식탁에 둘러 앉아 있습니다. 오른 쪽의 초상은 녹색과 청색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의복들은 지상의 녹색과 천상의 청색을 나타냅니다. 성령 하느님의 초상입니다. 그는 하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자로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이시지만(청색), 또한 지상에 거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녹색). 왜냐하면 성령님은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아들이 잉태되었을 때 창조의 대행자 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소개하는 분이십니다.


가운데 있는 분은 부분적으로는 청색이고 부분적으로 왕의 색상으로 된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는 성자 예수님의 초상입니다. 성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며 죽음을 이기시고 모든 것을 정복한 왕으로서 하늘의 영광으로 복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용서하는 사랑의 능력으로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세 번째 초상은 반투명의 옷을 입고 있는데, 이는 영원히 빛나는 내적인 영광을 나타냅니다. 여기 아버지가 위엄 중에, 그러나 이 지상에 방문하신 분으로 앉아 계십니다.


사랑은 끌림이고 향함입니다. 성부는 성자를 향하고 성자는 성부를 향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사랑으로 교통하고 하나되게 하십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는 정태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세 인격이신 성부 성자 성령님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온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십니다. 


서로를 향하여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그 사랑을 나눌 피조물인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 사랑이 전부인 까닭입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면 인격이 왜곡되고 사랑으로 채워지지 못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추구하고 탐닉하며 방황하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야 방황이 끝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를 살립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바른 인생길임을 알게 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모여 그 사랑으로 살기를 연습하는 사랑의 훈련장입니다. 감사성찬례 중에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면서 십자가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나를 채우면서 사랑의 존재로 성숙하게 됩니다.


다시 주보 1면의 삼위일체 그림을 보십시오. 이 초상들은 한 원 속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은 닫힌 원이 아닙니다. O자가 아닌 C자입니다. 전체 그림은 우리를 그 속으로 초대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참여해야만 그 원이 완성됩니다. 


이 그림을 감상한 영성가 헨리 나웬 신부님은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세 분이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 


세 분 하느님 상호간의 초대와 환대를 통한 ‘상호 내주’(相互內住), 내가 그 안에 있도록, 그가 내 안에 있도록 하는 사랑이 삼위일체의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바로 그 사랑의 관계 속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이 사랑의 관계로 들어갈 때, 삼위의 하느님이 한 몸을 이루듯이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오십위일체, 칠십위일체, 백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상에서 천국을 보여주는 공동체로 존재하게 됩니다.


침묵 가운데 그림을 바라보십시오. 헨리 나웬 신부님의 고백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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