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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함께 우시는 예수님

by 분당교회 2017. 4. 3.

2017년 4월 2일 사순 5주일
성공회 분당교회 김장환 엘리야 신부 설교 말씀

요한 11:1-45



1.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퀴즈를 냈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내 며칠 지나지 않아 그만 두는 것을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 답 : 작(  )삼(  ) /  한 아이가 손을 들어 대답했습니다. “작은삼촌”

사실 우리 모두가 작은삼촌들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두 주 남은 사순절을 잘 보내시고 주님의 부활의 기쁨을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성주간 성삼일 전례에 많은 참석 바랍니다. 주보에 그 일정이 나와있습니다. .

2. 우리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면, 쓰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편지에는 마음이 담겨지게 됩니다. 연애편지 써 보신 경험 있으시죠? 성경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연애편지입니다. 성경이라는 편지에 담긴 주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성경이라는 편지를 쓰신 목적은 우리로 영생을 얻도록 하시고자함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믿어야만 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복음서를 쓴 이유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 20: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이 진리를 믿게 하려고 모두 7개의 표적이야기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놀라운 일들은 더욱 많습니다.

요한 20: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오늘 본문은 일곱 번째 표적이야기로서, 예수님 스스로 자기 정체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복음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11:45,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선언이 있기까지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기적이야기는 아주 정교하게 구성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인 나자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즉시 베다니로 가지 않고 지체하십니다. ‘나흘 후’, 장례가 다 마친 후에 내려갑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에는 나자로의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님께 마르다나 마리아는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11:21,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11: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했는데...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서 즉시 달려올 수도 있었을 텐데... 숨이 끊어지기 전에 오셨어도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죽은지 나흘이나 지나 장례식도 마치고 이렇게 무덤에 묻었는데 이제 나타나시다니....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져야지 그것을 응답이라고 여깁니다. 응답이 지연되거나 응답되지 않는 것도 기도의 응답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서 진리를 깨우쳐 믿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믿게 하려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11:25-26,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주님은 죽은 나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이 진리를 확증하셨습니다. 물론 나자로는 다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적인 존재였지만 주님과 맺은 사랑의 관계, 영원한 생명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드린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지연되는 것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려는 주님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과 의도를 깨달아 알게 되어 생명과 부활이신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The Raising of Lazarus, by Duccio, 1310–11)


4. 이렇게 예수님은 나자로가 죽고 무덤에 묻힌, 상황이 종료된, 절망의 자리에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깨우쳐 믿게 하려는 목적만으로 우리의 상황을 방관하고 외면하다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나타나는 그렇게 냉정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33절과 35절을 보십시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이 시간 잠시 침묵하며 ‘복받쳐 올라오는 비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1분).


생각해 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데 그들에게 깨달아 믿게 하려는 진리가 있어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도 비통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되어 죽음이라는 고통을 치러야만 하는 인생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인생들을 이렇게 슬픔으로 내모는 죄와 죽음의 세력에 대해 분개하는 복잡한 마음이 예수님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복받쳐 올라오는 비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시는 예수님!


주님은 결코 우리의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런데 비통한 마음으로 그저 눈물만 흘리고만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무덤의 돌을 치워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동굴식으로 되어 시신을 안에 안치하고 돌로 그 입구를 막아 놓았습니다. 그 안에는 시체가 썩어가고 어둠만이 있는 지배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죽음과 절망의 현장을 주님께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자로야, 나오너라!”

주님 말씀 한 마디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제 끝이라고 절망하던 그 자리에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배 중 성체와 보혈을 영하기 직전에 이렇게 서로 응답합니다.
“사제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여기 계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회중 - 주여,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를 감당치 못하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이 고백을 드리며 성체와 보혈을 영할 때,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열어놓고 의탁하며 나오십시오. 그러면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 죄와 죽음의 현장, 나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은 지금도 죄와 죽음의 그늘 아래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 가난으로, 질병으로, 실패와 절망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울고 계십니다.

3년 전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죽어갈 때 주님은 어디에 계셨냐”고?

이윤추구를 위한 어른들의 탐욕과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여러 원인들로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304명의 귀한 생명들이 죽었습니다. 9명의 생명이 수습되지 못한 채 3년 가까이 바다에 잠겨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 차가운 바다 속에 계셨습니다. 비판에 빠져 울부짖는 유가족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북받쳐 오는 비통한 마음으로 함께 울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의 눈물을 다 닦아 주실 것입니다. 


이 자리 여러분 가운데에도 인생의 여러 문제로 힘들어 하고 눈물 흘리시는 교우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과 함께 울고 계십니다.

함께 울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 품에 안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울게 하는 그 모든 상황을 주님께 열어드리십시오. 다 맡겨드리십시오.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아울러 우리 모두가 예수님처럼, 우리 주변에 울고 있는 이웃들과 함께 아파하고 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신광철은 이렇게 짧은 시를 썼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사람으로 살아보니 그랬다.“

그들과 함께 흘리는 눈물은 그 자체가 위로를 주는 사랑이요 구원을 가져오는 기도가 됩니다.

주님께 위로를 받고, 주님의 사랑으로 위로하며, 우리는 그렇게 사랑 가운데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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