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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시리즈 :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 1881-1944): 철학적이었던 고위 성직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1. 17.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 변증가, 빼어난 교사요 전도자, 교회일치 운동가이면서 사회계급도 다르고 관점도 달랐던 온갖 사람들이 다 친구로 여겼던 성공회의 인물입니다. 20세기 전반부에 템플만큼 폭넓고 다양하게 사역한 인물도 드뭅니다. 템플은 켄터베리 대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것과 나란히 신앙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처럼 심각한 신앙의 회의나 의심이 없었습니다. 유별난 회심체험도 없었으니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템플에게는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가 문제인 게 아니라 어떻게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만이 문제였으니까요.

템플은 옥스퍼드 밸리얼 칼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 학생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옥스퍼드 퀸즈 칼리지에서 6년 간 철학 강의를 합니다. 그 후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당시 옥스퍼드 주교는 템플이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에 대해 정통적이지 않은 견해를 가졌다 해서 거절합니다. 하지만 3년 뒤 당시 켄터베리 대주교 랜덜 데이빗슨에게 서품을 받습니다. 아마 대주교는 템플이 아직 젊으니까 후에 견해를 온건하게 누그러뜨릴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마터면 템플 같은 유능한 인재가 성공회 성직에 오르지 못할 뻔했는데 다행이지요.

서품 후 템플은 런던 번화가 피커딜리 성 야고보 교회의 사제로 일하다가 렙톤학교 교장으로도 일합니다. 그러면서 신학저널을 발간하고 결혼하고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 성당 참사회 신부가 되기도 합니다. 1921년 템플은 공업화의 여파로 사회갈등이 심한 맨체스터의 주교가 됩니다. 1929년에는 요크 대주교가 되고 1942년에는 마침내 99대 켄터베리 대주교가 됩니다. 아쉽게도 템플은 그로부터 3년이 채 못 되어 사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전 과정에서 윌리엄 템플은 여러 면에서 선진적이라 할 활동을 펼치면서 영국뿐만 아니라 개신교 세계 전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 받는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템플 활동의 두드러진 네 가지 면을 보통 다음과 같이 꼽습니다: 1) 생명과 자유(Life and Liberty) 운동 - 영국 성공회는 국교다 보니 마치 정부의 한 기관처럼 기능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예산이나 임명 같은 큰 문제는 의회가 최종결정을 내렸습니다. 신앙적 수준은 관두고 아예 신자도 아닌 의원도 많은 의회가 교회에 대한 큰 결정을 내리는 모순을 템플은 참을 수 없어 했습니다. 그래서 1917년 피커딜리 성 야고보 교회를 사임하고 생명과 자유운동이라는 교회갱신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운동의 초점은 교회의 자율성과 평신도 일깨우기입니다. 즉 교회가 신앙과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대소사를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며, 소극적이고 수동적이기만 한 평신도들이 교회선교에 더 각성하고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운동을 위해 템플은 교회에서 받던 급여를 포기하고 1/3 수준의 수입으로 살기를 선택합니다. 이후 템플은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소모임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운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2) 대학선교 - 대학은 지금도 왕왕 그렇지만 당시에도 세련된 철학적 회의주의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런 학교들을 두루 다니면서 템플은 지적인 힘과 영적 열정이 잘 버무려진 설교를 통해 대학의 교회들을 되살려 놓았습니다. 어떤 때는 매일 밤 일주일이 넘게 집회를 하면서 설교하기도 했답니다. 어느 날 밤 템플은 사람들에게 성가를 부르기 전에 이렇게 도전을 합니다. “이 성가 가사는 굉장한 말씀입니다. 그러니 온 마음으로 거기 일치한다 싶으면 큰 소리로 부르십시오. 하지만 가사와 같은 마음이 자신에게 없거든 아예 입을 다무십시오. 그래도 조금은 있다, 그리고 좀 더 있길 바란다 하면 아주 조용히 부르시기 바랍니다.” 일순 침묵이 깔리고 사람들은 의례껏 부르던 가사의 의미를 곱씹었습니다. 마침내 성가가 시작되자 2천여 명은 일제히 속삭이는 음성으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3) 교회일치 운동 - 윌리엄 템플은 1910년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 회의(the Faith and Order Conference)에 참가하면서 교회일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회의는 개신교 교파들을 갈라놓는 교리와 제도 문제를 다루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1929년에 이르면 템플은 신앙과 직제 위원회 의장이 됩니다. 그리고 1937년에는 이 교회일치 운동을 생명과 일운동과 합치는데 생명과 일 운동이란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놓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목소리를 내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과 더불어 템플은 천주교 및 러시아 정교회와도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4개의 개신교 교파가 하나가 되어 남인도교회를 이루는 과정을 돕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지속되어 마침내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the World Council of Churches)가 탄생합니다.

템플은 유머감각과 끈질긴 근성, 상식과 개방성을 갖고 교회일치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놓고 죽을 때까지 노력을 기울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교 교회가 하나가 되어 세상에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전과 열망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살아생전 템플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가 개신교와 정교회를 향해 했던 역할은 천주교를 향해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끌었던 요한 23세의 역할에 비견할 만합니다. 아니,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에야 시작된 점을 볼 때 성공회의 윌리엄 템플이 먼저 시작한 역할과 비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4) 2차 세계대전 - 전쟁 중에 윌리엄 템플이 켄터베리 대주교로서 영국민에게 미친 영향은 윈스턴 처칠에 버금가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들을 돕는 기근구호활동을 하는가 하면 영국정부를 설득해 유럽의 유대인들의 안전을 우선적으로 도모하는 정책을 수립하게도 합니다. 그리고 글과 설교, 방송연설을 통해 나치주의를 우상숭배를 규정하는 한편 무력의 사용은 최소한도로 해야 하며 독일인들을 향해 보복심으로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고 꾸준히 일깨웁니다. 그리고 독일 전쟁포로들도 인간다운 예우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죄란 보편적인 것이라서 전쟁의 쌍방이 다 회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독일의 폭탄이 영국 도시에 떨어지고 있는 마당에 템플은 전쟁 너머에 용서와 화해의 시대를 바라보자고 일깨웁니다. 템플은 무조건적 비 폭력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한 단계 높은 포괄적 의식을 대변했기 때문에 반전주의자들에게도 신뢰를 받았습니다.

한편 윌리엄 템플은 다작(多作)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단에 올라가서 간단한 메모만으로 세련된 강의를 할 수 있는 재능인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서른다섯 권의 책을 냈는데 대부분 강의를 바탕으로 한 내용들입니다. 템플의 책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은 요한복음 강독(Readings in St. John's Gospel)인데 템플은 요한복음을 참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템플은 요한복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혹자는 그가 성서비평학의 성과를 무시했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템플은 학문적 주해서를 쓰려는 것이 아니라 끼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경건서적을 써낸 것입니다. 이 대목은 꽤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활동가, 운동가들 중에 윌리엄 템플처럼 복음서 묵상과 활동을 통합해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하물며 템플은 켄터베리 대주교 즉 고위성직자인데 말입니다.

템플이 1942년에 낸 그리스도교와 사회질서(Christianity and Social Order)는 마지막 저술이면서 가장 도발적이라 할 책입니다. 템플은 정치적 입씨름도 마다하지 않아서 평생 파업이나 전쟁 같은 온갖 주제를 놓고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템플은 자신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그렇게 활동해 왔는지 밝힙니다. 그리고 통념을 뭉개 버립니다. 예컨대 교회는 사적영역과 신심행위에만 관련된 기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처음부터 사람살이의 공적영역에 대해서도 발언해 왔고 만약 경제 질서가 그리스도교적 성품을 빚어내는데 저해가 된다면 교회는 마땅히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템플이 교회가 지켜야 할 선도 긋습니다. 즉 어느 방향과 목표를 향해야 할지 발언은 하되 거기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과 수단은 정치가들 손에 맡기라는 것이지요. 템플이 보기에 한 사회는 그 안에 개인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사회적 친교(건강한 가족, 국가, 국제관계), 파당성보다 더 큰 가치를 우위에 두고 봉사하는 정신이 있을 때 건강합니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의도한 그 사람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템플은 1931년 이런 말을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서로 분열을 일으킬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 성공회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톨릭, 복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라 보통 일컫는 이 세 가지 요소를 더불어 끌어안을 필요가 있다.” 그는 가톨릭성을 교회의 연속성(시간적)과 통일성(공간적)을 전례로 표현하는 것에서 봅니다. 이는 일종의 시공적 민주주의로서 교회가 예나 지금이나, 또 어디에서나 공통으로 믿는 것을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또 복음주의를 말할 때는 그 핵심으로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직접적 관계성을 듭니다. 그게 종교개혁의 핵심이고 그런 의미에서 성공회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이 자기 신앙의 의미를 찾고 그 바탕에서 자발적으로 연합하는 태도를 자유주의란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지 멈춰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가톨릭성은 전통주의, 복음주의는 배타적 근본주의, 자유주의는 각자 제 소견대로 행하면 그게 성공회라는 식의 신학적 무정부주의로 환원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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