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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 시리즈 :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성공회풍의 기초자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5.

어느 교회든 자기 교파의 신학을 대변하는 대표적 인물이 있습니다. 루터교는 당연히 루터를 꼽을 것이고 장로교라면 칼뱅을 들 것입니다. 천주교는 아퀴나스를 들겠지요. 성공회는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리차드 후커라는 이름을 기억해 두기로 합니다. 사실 일반 성공회 신자생활에서 자주 들어볼 수 있는 이름은 아니지만 전 세계성공회는 이 사람에게 빚을 진 바가 큽니다. 후커가 아퀴나스처럼 교리의 소소한 부분까지 총망라한 신학대전 같은 저술을 남겼다든지 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신학적 숙고과정에서 보여준 풍모가 성공회의 소중한 유산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리차드 후커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교회는 1532년 로마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이후 삼십여 년은 왕이 누구냐에 따라 옛 가톨릭 신앙과 개혁적 신앙 사이를 오가며 서로 박해하고 피를 흘리는 폭력적인 시대가 됩니다. 그러다가 성마른 성격에 인기가 별로 없었던 메리여왕이 죽고 엘리자베스여왕이 1558년에 즉위하면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회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집요하고 극단적인 형태의 개혁신앙이 영국에서 한창 발흥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파당성 강한 집단은 영국의 교회를 청결하게 만들고자 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에서 “청교도”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로마교회 냄새가 나는 건 죄다 제거하고자 들었는데 전례와 복색, 교회 이름을 성인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것, 기록된 기도서의 사용, 축일, 나아가 주교제도 자체를 없애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성서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행위는 일절 금하자고 했습니다. 나아가서 청교도들은 국가권력을 통해 이러한 개혁을 교회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실시하길 원했습니다. 후커는 이들 청교도들과 종종 논쟁을 벌였는데 1595년 켄터베리 근처의 한 교회에 부임하면서 성공회의 기념비가 될 만한 여덟 권짜리 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책의 제목은 좀 따분하게도 「교회제도의 법칙에 관하여」(Of the Laws of Ecclesiastical Polity)라고 붙였고 부제로 “어떻게 국가교회를 세우고 운영할 것인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후커가 「제도」를 쓰면서 염두에 둔 상황이란 16세기 영국의 종교논쟁입니다. 특히 성서만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유일한 권위여야 한다는 청교도들의 주장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들과 달리 후커는 성서와 더불어, 자연, 인간경험(개인이 하는 경험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게 이전의 많은 사람들, 현명한 사람들이 경험한 것 즉 전통을 포함하는), 이성도 다 진리를 찾는데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물론 후커가 말하는 이성은 한 세기 뒤에 등장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절대적이고 자율적인 이성과는 같지 않습니다. 성서와 마찬가지로 이성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하느님의 권위에 종속되어야 하는 무엇입니다. 후커가 보기에 성서는 인간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담고는 있지만 말하지 않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특히 교회제도나 예식에 관한 한 성서는 전반적으로 별 말이 없으며 말하고 있는 걸로 보이는 몇 군데도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보편적인 내용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맞는다면 교회의 제도나 예식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문제라고 후커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후커는 경고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전의 전통을 폐기하고자 할 때는 교회는 정말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가 왜곡되고 변질된 면이 많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후커는 원래의 취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지 제도나 예식 자체를 버려야 하는 걸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칼을 들고 있으면 잘못 사용할까봐 칼을 뺏긴 하지만 그렇다고 칼 자체를 버리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전통의 예식과 제도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면서 개혁을 추구하는 후커의 풍모는 그 자체로 성공회의 풍모가 되었습니다. 당시 성찬례에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할 때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을 때였는데도 후커는 의도적으로 말을 아꼈습니다. 왜냐하면 “성찬례를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을 묵상하는 일, 그래서 우리의 텅 빈 영혼을 채우는 하늘의 양식을 받으면 그만이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논쟁을 벌이는 일은 덜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오늘날까지 성찬례의 신학에 있어 후커의 태도가 성공회적 태도가 되었습니다.

후커의 글은 너그럽고 적들조차도 달래려고 하는 친화성이 특징입니다. 날카롭게 서로를 정죄하고 비꼬며 지옥불에 떨어질 악마로 정죄하곤 하던 당대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지요. 하지만 후커는 당시 청교도들이 많이 의존하던 칼뱅을 “프랑스 교회역사에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라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적들의 인격도 존중하며 그들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한 동료들로 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우리가 서로 이단이라 했던 사람들도 보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정신, 적에게서도 선을 찾으려 하고 기꺼이 손을 내미는 후커의 풍모야말로 이후 포용성 뛰어난 성공회 정신의 한 뿌리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커를 읽노라면 오늘날 성공회에서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가장 불편한 집단이나 개인은 누구인가? 후커처럼 적의 선한 면을 본다면 그들의 선한 면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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