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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성공회 인물 시리즈 :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1489-1556): 성공회 기도서의 아버지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11. 5.

1556년 3월 21일 토요일 정오 조금 못 미쳐 옥스퍼드에는 차가운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성 마리아 교회에는 사람들이 빼꼭히 들어차 있었고 지난 3년간 옥살이를 했던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가 설교 도중에 끌려 내려와 기둥 앞에 섰습니다. 쇠사슬로 기둥에 묶이자 곧이어 주위에 쌓아올린 나무에 불길이 일었습니다. 크랜머는 오른손을 뻗어 불길에 집어넣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이 손이 죄를 지었소!” 크랜머의 몸이 불붙어 다 타버릴 때까지도 그는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크랜머는 원래 대주교 될 생각이 없던 인물입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학감으로 있으면서 가끔 왕 헨리 8세의 외교사절 노릇이나 몇 번 하곤 했을 뿐인데, 1529년 헨리 8세가 캐서린 왕비와 혼인무효를 원하면서 그의 운명도 달라졌습니다. 크랜머는 그런 왕의 입장을 신학적으로 옹호했던지라 3년 뒤 왕은 그를 새 켄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던 것입니다. 대주교로서 그는 헨리 8세의 혼인무효를 선언했고 앤 볼린과의 결혼을 축복해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 8세에게는 입의 혀 같은 인물이었으나 크랜머 자신은 나름의 신학적 확신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실 크랜머는 당시 대륙의 종교개혁에 깊이 영향을 받았고 교회의 모든 진리는 오직 성서에 기반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서엔 도무지 교황에 대한 언급이 없는 반면 하느님을 섬기는 왕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영국이라는 나라와 교회를 따로 보지 않았던 크랜머로서는 먼 곳의 교황보다는 자국의 왕이야말로 하느님을 대리할 종이라고 본 것입니다.

크랜머의 개혁에는 성공회가 오늘날도 기억할 만한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국민이 마음에 와 닿는 모국어로 예배드려야 한다고 보아 라틴어 미사를 과감히 버렸습니다. 이는 라틴어가 일반신자들 마음에 가 닿지 않는 상황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헨리 8세 때 이미 성서는 영어로 번역되었거니와 에드워드 6세 때 모든 크고 작은 예배는 모두 영어로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신자들이 좋은 설교를 듣고 성서를 체계적으로 읽음으로써 신앙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회 신자들이 기도서 정과표대로 성서를 읽어나갈 때 일 년이면 대략 신약을 세 번, 구약의 주요내용을 한번 읽고 묵상할 수 있게끔 배열한 것입니다. 이렇듯 성서를 전체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읽는 전통, 로마교회와는 달리 설교를 강조하는 전통은 성공회의 기풍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셋째, 크랜머는 예배를 단순화했습니다. 로마교회의 중세기적 예배양식과 기도서들은 너무 복잡다단하고 많아서 언제 어느 예배양식을 쓰고 무슨 동작을 어떻게 하고 하는 소소한 일에 신경쓰느라 정작 예배의 심장은 놓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크랜머의 기도서는 그 모든 것을 단순화해서 한 권에 집약해 놓은 것입니다. 넷째, 그는 예배에 평신도가 구경꾼이 아닌 진정한 예배자로 참여할 수 있길 원했습니다. 이전까지 일반신자들은 사제가 저 앞의 제대에서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라틴어)로 뭔가 비밀스럽고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먼 치에서 구경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크랜머가 당시 여덟 번 드리던 베네딕트 수도원의 기도를 축약해서 아침과 저녁기도 두 번으로 한 것은 신자들이 사제가 없어도 자신들끼리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다섯째, 로마교회의 관점처럼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번번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 온전히 드려진”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체 변화한다고 하는 화체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감사와 찬미가 더 중요한 것으로 강조했는데 이는 성공회가 천주교회와 다른 주요한 차이입니다.

개혁주의자 에드워드 6세가 1553년 갑자기 죽고 왕위는 호전적인 교황주의자 메리(캐서린의 딸)에게 돌아갑니다. 메리여왕이 즉위하고 몇 주 되지 않아 크랜머 대주교는 체포되어 수감됩니다. 감옥에 갇힌 3년 간 크랜머는 깊은 번민에 싸입니다. 왕이 영국교회의 수장이라는 것이 크랜머의 확신이었는데 이제 그 왕이 로마교회로 돌아가자고 하니 말입니다. 도대체 진리는 무엇이고 하느님은 어디 계신 것일까? 하느님은 자신에게 무얼 기대하셨던 걸까? 혼란과 번민 속에서 크랜머는 이전의 개혁조치를 철회하는데 동의한다는 문서에 여러 차례 서명합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 날, 원래 읽게끔 되어 있던 내용을 읽다말고 크랜머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신학적 신념을 말하다가 강단에서 끌어내려져 화형을 당합니다. 그가 화형 당하면서 오른손을 뻗어 “이 손이 죄를 지었소!” 외친 까닭은 크랜머가 감옥에서 메리여왕의 강요로 개혁철회 문서에 서명한 자기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재가 될 때까지 뻗은 손을 불길에서 빼지 않았던 크랜머의 최후 장면은 당대 영국 그리스도인들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고 그때까지 영국 땅에 남아있던 로마교회에 대한 심정적 지지는 그날 1556년 3월 21일자로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후대의 사가들은 말합니다.

토마스 크랜머의 예배개혁의 정신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우리 대한성공회의 예배에서 반성할 점은 무엇일까요?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이주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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