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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4월 19일 (부활2주일/설립10주년기념) 강론초 (요한 20:19-31)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4. 19.

2009년 4월 19일 부활 2주일 성서말씀
 
사도 4:32-35
32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33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1요한 1:1-2:2
1 우리는 생명의 말씀에 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2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냅니다. 5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그대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고 하느님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좇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 그러나 하느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입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1 나는 믿음의 자녀인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고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혹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요한 20:19-31
19 안식일 다음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21 예수께서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중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었다.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자 토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토마도 같이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께서 들어오셔서 그들 한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다. 27 그리고 토마에게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28 토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기적들도 수없이 행하셨다. 31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부활하신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시어 평화를 전해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도 새 생명의 기운을 부어 주시어 부활의 소망과 믿음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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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부활 공동체
(요한 20:19-31)

은총의 부활 2주일, 특별히 분당교회 설립 10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요한은 자기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초대교회가 경험하고 고백하는 부활체험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흔히 도마처럼 의심하거나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지 말고 무조건 주님의 부활을 굳게 믿어야 은총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들은 실상 우리에게 그저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을 만하고 믿어야 하기 때문에 믿으라 하지 그냥 억지로 무조건 믿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성경은 도리어 우리 믿음의 내용과 성령체험을 잘 살피고 분별할 것을 권합니다. 물론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함을 전제로 해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참된 이해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차원이 되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어째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고 하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이 역사상 유일무이한 놀라운 기적이고 이 기적이 바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부활체험이 단지 소생하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다는 경험이 아님을 구체적으로 전해줍니다.
분명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문을 닫아 걸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 함께 하시며 두려움을 이기는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고 세상의 죄를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 권세를 주십니다.
닫힌 방안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나가도록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의 인식과 존재와 관계의 차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물리적인 사건, 심리적인 사건으로 환원할 수 없는 차원의 영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도마의 물리적, 심리적 의심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말씀을 받아들이며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심오한 영적인 고백으로 변화됩니다.


교회는 부활공동체입니다.
죽을 운명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설립 10주년이 된 분당교회는 화려한 성전도 많은 수의 교우도 자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반성은 우리가 참된 부활공동체인가에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느님께 헌신하고 교우로서 친교하며 세상의 낯설고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가요?
우리는 평화와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인가요? (2009.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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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가 증언하는 부활은
(요한 20:19-31)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절대적인 초석인 동시에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쉽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상식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법은 절대로 없고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방향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흐릅니다. 한 흐름은 그렇기에 부활이 바로 예수님이 보통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인간’임을 드러내준다고 받아들이는 견해입니다. 역사의 유일한 예외로 예수님만은 죽었다가 그 시신으로 실제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다른 흐름은 예수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상징적으로 구성된 일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참으로 위대하셨던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력히 남았는데 그 기억을 부활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교우님들은 어떤 입장이실까 궁금합니다.

결론을 내기 전에 먼저 반성해볼 것은 성경이 전하는 부활의 의미가 단순한 사전상의 낱말풀이는 아닐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이 일점일획 틀림없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 성경이 부활을 말하므로 의심 없이 부활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국어사전 읽듯 하는 다소 어리석은 태도이지 그다지 신심 깊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 입장인 것처럼 보이는 “부활이란 과학적으로 분명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저 상상이나 상징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그 수준은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설명과 주장이 아닙니다.
부활사건은 제자들이 십자가 사건 후에도, (어쩌면 바로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여전히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뵙고 변화된 체험 자체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대한 두려움에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평화의 인사를 하시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당부하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용서의 사역을 맡기시는 장면입니다. 부활은 바로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토마의 의심은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시는 못자국을 통해서 곧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으로 회복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이는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중요한 것은 부활사실의 실증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이 성찬예배의 말씀과 성사 가운데 주님의 복음을 깨닫고 주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며 그 분의 현존을 우리 삶 속에서 이어갈 수 있는가 하는 믿음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2006. 4.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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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지 않고도 부활을 믿는 이유

  복음사가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은 다만 사람들이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신앙 없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은 “증거”가 분명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정과 동의를 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는 삶을 뜻합니다.

복음서는 후자에 속하는 우리의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처럼 예수님을 직접 모시지 못하였고 토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시는 것을 직접 체험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대에 또한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로서 부활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엄연한 사실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부활을 어떻게 증언한다는 말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이 중요하고 “사도들의 증언”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진리를 말하는 권위로서 제일먼저 “성경”에 의지하고 다음으로 “사도성(전통)”에 의지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사도들의 증언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소생하셨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빌라도나 대사제에게 육신으로 찾아 가셔서 혼을 내주셨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신비한 몸으로, 그러나 못자국, 창자국 선명한 몸으로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부활은 예수님의 시신에 일어난 가시적 생리적 차원의 신기한 기적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 예수님의 전인격 존재에 관하여 하느님이 “옳다”고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지요.
십자가의 주님이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패배처럼 보이는 희생이 부활의 절대적인 승리라는 것입니다.(2003.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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