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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2009년 4월 26일(부활3주일) 강론초 (루가 24:36-48)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4. 20.


2009년 4월 26일 부활 3주일 성서말씀 
 
사도 3:12-20
12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준 줄로 생각합니까? 13 여러분이 하느님의 종 예수를 잡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을 때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작정하였는데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그 하느님께서 바로 그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해주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죄없으신 그분을 배척하고 그분 대신에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여 15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다 그 목격자들입니다. 16 보시는 바와 같이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은 바로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 17 그런데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탓이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미리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19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며 20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예수가 곧 그분이십니다.

1요한 3:1-7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뵙겠기 때문입니다. 3 그리스도께 대하여 이런 희망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하느님의 법을 어기는 자입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곧 죄입니다. 5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6 언제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언제나 죄를 짓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7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사람입니다.

루가 24:36-48
36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  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40 하시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셨다. 41 그들은 기뻐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어리둥절해 있는데 예수께서는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좀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예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46 "성서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하였다. 47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생명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께서 빵을 떼실 때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았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어 지금도 세상 속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주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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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사건은 그리스도의 구원 이야기
(루가24:36-48)

제가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되풀이 하여 강조하는 것은 성경이 전하는 부활은 예수님의 시신이 소생한 기적 이야기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은 주님 부활의 현실성을 시신 소생의 사실성으로 좁혀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부활을 시신소생으로 믿어도 틀린 것은 아니고 그렇게 믿으며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사목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소박하게 믿는 분들이 훨씬 교회 일에 충성하고 성직자가 돌보기 편한 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교우님들이 그런 믿음에 머무는 것을 그냥 두고 보기 어렵습니다. 주제넘은 표현일지 몰라도 어쩌면 저는 일종의 “예언자”로서 이 부분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우리 현대인은 의무교육을 통해 과학적 사고를 교육 받습니다.
과학적으로 완전히 죽은 이의 되살아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합니다.
그럼 성경은 과학을 부정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차원의 인간의 영적 삶에 대한 신앙적인 진리를 전합니다.
우리 삶은 사실성만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현실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되어 세포 분열한 결과라는 과학적 설명으로는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위대한 신비인 것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차원의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주님의 부활사건을 두고 시신소생의 사실 여부에 관심하는 것은 우리가 교육받은 과학적 관점을 은연중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과학적 관점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의 관점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의 사실성이 아니라 부활의 신비와 부활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직접 경험한 현실이었지만 그것은 과학적(=사실적)으로 이해되는 시신소생의 차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열어주시고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사(救援史)를 깨달아야 가능하다는 것이 오늘 루가복음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한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사건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야기의 절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것은 단순히 기적사건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하느님나라 선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아니, 그럼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거야?”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은 제자들이 경험한 분명한 실제 사건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사실적인 사건으로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활에서 기적이야기만 보고 예수님의 구원이야기를 잊어버리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모든 가치판단의 궁극적 기준이므로 어떤 믿음이든지간에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이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부활을 기적으로만 이해하는 이는 삶의 모든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기적적인 해결을 신앙의 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위험합니다.

유일한 신앙의 답은 지금도 살아계시어 우리 삶에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참된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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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신앙은 현실의 삶을 위한 것 (루가24:36-48)

우리는 성경이 구원에 필요하고 충분한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인 것을 믿습니다. 제가 구분하여 명확히 하고 싶은 것은 그 구원의 진리란 성경의 “문자 그대로”가 의미하는 “사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이야기를 통하여 전해지는 “하느님의 뜻”의 “현실성”에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저 세상, 영계(靈界)의 정보가 담겨있는 문자의 모음이 아니라,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간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인 것입니다.

성경에 무수한 기적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성”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런 기적이 실제 일어났다는 점을 중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도 우리는 하느님께 그러한 기적을 기대하는 믿음을 의지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은 능히, 당연히,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지만 정직하게 세상을 보십시오. 세상은 그런 우연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이 정하신 섭리를 따라 법칙적으로 경영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뜨게 되면 우리는 모든 평범한 일상의 생명과 자연과 인간사가 참으로 기적의 연속임을 보게 됩니다. 섭리가 곧 기적인 것입니다. 섭리에 대한 경탄과 감사를 잊고 나의 요구를 충족하는 신기한 기적만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으로 여기며 물리치신 사탄의 유혹입니다.

기적이야기를 “현실성”에 초점을 두고 읽으면 우리는 그런 기적이 필요한 인간의 절박한 상황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절박함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기적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는가” 하는 사실성보다도 “기적이 왜 일어났으며 사람들이 그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고 깨달았는가” 하는 현실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현실성의 자각을 통해서 우리는 수천년 시간을 넘어 성경 속의 그 구름처럼 많은 믿음의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지금 나의 문제에 대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이 베푸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먹을 것이 없느냐”고 하시며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일은 사실 육신의 죽음을 이기신 분으로서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주님께서 부활의 참뜻을 알려주시는 대목입니다.
부활이 보장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은 후에 영혼이 저 세상에서 천당에 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먹고 입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과연 주님을 따르는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가 부활의 본질입니다.
우리 육신의 필요를 채우는 이 삶에 하느님을 모시는 영적인 삶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절대적 행복임을 깨닫는 일이 참된 부활 체험입니다. (2006.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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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의 진리 - 성령으로 몸의 삶을 살아가기

흔히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교회(성직자)가 가르치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영혼이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도록 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을 묵상해보면 그런 단순한 믿음이 지니는 문제점들이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기에 무엇이든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으십니다. 죽음을 이기신, 상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분이 육신의 먹을 것을 찾으시는 것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씀에는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로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참뜻을 전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구체적 현실의 삶을 위해 일차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다른 많은 종교적 인물들처럼 부활이 필요 없이 그저 “영계의 존재”로만 머물러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영혼불멸하는 유령(영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 않고 다만 사후의 영혼이 홀로 천국에 들어가는 평가기준으로만 중요할까요? 터무니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 따로 사후의 영생을 바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과 무관하게 영계의 일만 다루는 종교란 유령과 같이 헛되고 거짓된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바로 육신으로 사는 우리네 삶이야말로 중요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육신만을 중시해서 육체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생리적으로 기능하는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는 영적존재입니다.
부활의 능력은 하느님의 영으로 우리네 몸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몸의 참된 가치는 성령의 전으로 세워질 때 보장됩니다.

영으로 산다는 것은 몸을 부정하고 정신을 억압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기적인 탐욕과 어리석음과 미움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심중에 모시고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 즉 우리 좁은 자아를 초월하는 삶을 뜻합니다.(2003.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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